신라의 수도 경주에는 많은 화려한 당시의 유적지와 유물들이 남아 있지만 많은 것들은 지금은 사라져 버리고 없다. 사라진 많은 것들 중에서도 가장 아쉬운 부분이 경주에 황룡사가 아직도 남아 있었더라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현재 기준으로도 20층 가까운 높이의 황룡사 구층목탑은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서 없어져 버리지기 전까지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경이로움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황룡사 금당이라던가 목탑의 형태는 지금도 일본 나라의 사찰들에 그 형태가 남아 있는 것 같아서 그 사찰의 모습으로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황룡사를 보면서 당시 사람들은 고대 사람들이 피라미드나 바빌로니아의 하늘 정원 등을 보았을 때의 느낌과 비슷할 것으로 생각된다.
1. 황룡사 중문, 남문, 회랑 터
2. 황룡사지 구층목탑, 종루, 경루
3. 황룡사지 금당터
4. 황룡사지 강당터, 우물
사적 제6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553년(진흥왕 14) 월성(月城)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지으려고 할 때 황룡이 나타나자 그곳에다 황룡사라는 절을 짓기 시작했으며 574년에는 장륙존상(丈六尊像)을 만들어 안치하고, 584년(진평왕 6)에는 금당을 건립했다고 한다. 645년(선덕여왕 14)에는 목탑을 세웠고, 그뒤 몇 차례 중건되면서 고려시대까지 국가왕실의 보호 아래 호국사찰로서 숭앙되었으나 1238년(고종 25) 몽골 침입으로 모두 불타버리고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이 절터는 문화재연구소 주관으로 1976년 6월부터 1983년 12월까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총면적 약 2만 여 평에 중문(中門)·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일탑식가람배치(一塔式伽藍配置)로 알려졌으나, 금당의 좌우에 거의 같은 규모의 건물이 나란히 있고 탑 앞쪽에도 역시 좌우에 종루(鐘樓)와 경루(經樓)로 보이는 건물이 대칭으로 서 있는 독특한 가람구조였음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 건물들은 회랑(回廊)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특히 남회랑이 동·서 회랑보다 더 길게 연장되어 있고, 이 남회랑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북쪽으로 긴 건물지가 연결되어 있는 점 등에서 회랑이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독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특이한 가람배치는 〈삼국유사〉에도 보이듯이 황룡사가 1, 2차에 걸쳐 가람이 형성되었다는 사실과도 일치된다. 현재 절터는 민가와 경작지로 변하여 흔적만 남아 있지만, 특히 신라3보(新羅三寶)인 장륙존상과 9층목탑이 있었던 석조대좌와 심초석이 남아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 황룡사는 삼국시대에 가장 큰 규모의 절로 신라 불교수용 초기에 지은 흥륜사(興輪寺)와 함께 6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왕실사찰이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인도에서 전래된 상을 모본으로 만든 장륙존상이나 9층탑에 대한 전설, 가섭불이 앉았던 연좌석(宴坐石)의 기록 등에 의해서 신라가 석가탄생 이전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은 불국토(佛國土)였음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신라불교 문화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출처: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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