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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터

파주 혜음원지, 고려시대 교통로 있었던 여관인 원(院)

younghwan 2010. 10. 2.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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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음원지는 파주시와 고양시를 잇는 고개인 혜음령 동쪽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 혜음원에 대한 기록은 김부식의 '혜음사 신창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고려 예종 16년(1122년)에 지어진 국가에서 운영한 숙박시설로 왕의 남행시에는 행궁의 역할도 했다고 한다. 혜음원지에서는 24동의 건물터에 각종 청자류, 불구, 기와편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혜음원은 그 건립연대가 정확하게 알려져 있으며, 당시 서울지역과 개성지역의 교통로, 사회경제사 등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국가에서 운영하는 공식적인 기능이 혜음령 북쪽에 있었던 혜음원에서 혜음령 남쪽 벽제에 있던 고양군 관아의 벽제관과 관아 주변의 민간시설에 그 기능이 넘어가면서 폐사되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원은 고려시대에 주요 도로상에 여행자를 위해 설치한 여관으로 지방통치와 교통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주로 원이 사찰에 부속되어, 승려들이 관리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원과 사찰이 동일시 되기도 했으며, 일반 사찰도 원의 역할을 많이 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경우 원은 선원이 원으로 전환되거나, 개인소유  주택을 개조한 것이 많았다고 하며, 사찰 중에서도 원의 기능이 강했던 남한강변에 있는 여러 사찰들과 주요 교통로 있었던 서산 보원사 같은 사찰들은 원의 기능을 하면서 가졌던 경제력이 없어지면서 폐사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전기에 원은 각도의 관찰사가 지역을 순찰할 때 많이 사용하기도 했지만, 주로 여행자들이 이용했다고 한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는 고위층 양반의 경우는 각지역의 대저택에서 머무는 경우가 많고, 일반인들은 주막을 이용함에 따라서 그 기능이 쇠락하였다고 한다.


파주 혜음원지는 파주와 고양의 경계인 혜음령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시대 개성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도로는 지금의 1번국도가 아니라, 파주읍에서 용미리를 거쳐서 고양벽제로 이어진 길이며, 혜음원지는 파주에서 벽제로 넘어가는 길에서 민가가 보이지 않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옛날에는 혜음령에 도적이 많아서 이곳에 여관인 원(院)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혜음원은 기본적으로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여지면, 전체 영역은 절터, 행궁터, 여관인 원(院)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금도 많은 건물초석과 축대 등이 남아 있다.


제일 위쪽에 있던 혜음원지의 중심이 되는 건물이 있었던 자리로 아마도 불전이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축대의 높이가 높아서 상당히 웅장한 느낌을 주었을 것 같다.


혜음원지 제일 안쪽에는 절터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최근에 혜음원 사적지 정비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건물축대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비어있는 부분을 새로운 석재로 보강해서 원래 절터 모습을 보여주려는 의도인 것 같다.


혜음원지 정비작업에서 축대를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려는 의도인 것 같다.


사찰로 들어가는 출입 통로인지, 건물터인지 헷갈리는 부분인데 석재로 바닥을 깔아 놓고 있다.


축대를 각단마다 축대를 쌓아 놓고 있다.




사찰터 아래에 있는 건물터. 일반적인 사찰구조로 봤을때는 승려들이 머무는 요사채 건물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사찰터의 경계(?)가 되는 지점으로 생각되는 배수로.



혜음원지는 남북으로 약 106m에 걸쳐 9개의 단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사찰의 경계로 보이는 배수로 아래에는 행궁 또는 조신시대 객사와 비슷하게 고위인사가 묵었을 것으로 보이는 큰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운데 큰 건물터가 있고, 양쪽에 작은 건물터가 있다.


파주 혜음원지 앞쪽에는 일반인들이 묵었던 원(院)이 있었던 터가 있는데 아직 정비가 덜되어서 그런지 잡초가 무성해 보인다.


잡초가 무성한 혜음원 앞쪽 건물터


혜음원지 옆으로 흐르는 개울. 옛날 석재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시골임에도 석재가 개울바닥에 깔려있어서 인공적인 느낌을 준다.


혜음원 건물 또는 축대에 사용된 석재.


목재기둥을 올려 놓았던 주춧돌


한쪽에 모아 놓은 기와 파편들


혜음원지가 있는 혜음령을 넘으면, 벽제관이 있는 옛 고양관아 지역이 있다. 아마도 조선시대에는 벽제관에 국가에서 운영하는 원(院)의 기능을 넘겨주고 폐사지가 된 것으로 보인다.



위성사진에서 보이는 78번도로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서울과 개성을 연결해 주는 도로이며, 혜음원은 지금은 골프장으로 변해 있는 혜음령을 넘어가는 길목에 있다. 혜음령을 넘으면 벽제관지가 있는 옛 고양군 관아 지역이다.

『동문선(東文選)』 권 64 기 「혜음사신창기(惠陰寺新創記)」는 혜음원의 창건배경과 그 과정, 창건과 운영의 주체, 왕실과의 관계 등을 기록하고 있는 문헌이다. 이에 의하면 혜음원은 남경과 개성간을 통행하는 관료 및 백성의 안전과 편의를 위하여 고려 예종 17년(1122)에 건립된 국립숙박시설이며 국왕의 행차에 대비하여 별원(別院)도 축조되었다고 전한다. 고려 및 조선시대에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되었던 혜음령이라는 명칭의 유래에서 그 위치가 추정되어 오다가 1999년 주민의 제보에 의해 행해진 조사에서 「惠蔭院」이라고 새겨진 암막새가 수습됨에 따라 현재의 위치를 확인하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2004년까지 지속적으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전체 경역은 원지, 행궁지, 사지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현재까지의 발굴조사 결과, 동서 약 104m, 남북 약 106m에 걸쳐 9개의 단(段)으로 이루어진 경사지에 27개의 건물지를 비롯하여 연못지, 배수로 등의 유구와 금동여래상, 기와류, 자기류, 토기류 등의 많은 유물이 확인되었다. 혜음원지는 문헌과 유구, 유물을 통해 원(院)의 구조와 형태, 운영실태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왕실, 귀족, 평민 등 각 계층의 생활양식을 전해주는 유적으로서 고려 전기 건축 및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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