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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는 원래 구층석탑 뒷편으로 금당이 하나만 있었던 일탑식 가람배치였으나, 확장되면서 금당 좌우에 비슷한 규모의 금당이 들어서는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황룡사 금당에는 신라 3대 보물중 하나인 장륙존상과 솔거의 그림이 걸려 있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일본 나라의 동대사 본당과 비슷한 형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황룡사 구층목탑 뒷편에는 본당이라고 할 수 있는 금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금당에는 거대한 불상인 장륙존상과 솔거의 그림이 있었다고 합니다.
황룡사 목탑터에서 본 금당터입니다.
황룡사 금당터 중앙에는 세개은 커다란 석재 받침대가 있는데 이 것이 거대한 장륙존상을 비롯한 삼존불상을 받쳤던 받침돌이라고 추정되는 것 같습니다.
황룡사 금당의 기둥을 지지해 주던 주춧돌입니다.
황룡사 강당터에서 본 금당터입니다.
황룡사 동쪽편 금당 모형과 금당터입니다.
황룡사 서쪽편 금당 모형과 금당터입니다.
황룡사 금당과 비교할 수 있는 건물로 생각된 일본 나라의 동대사 본당 건물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목조건물이라고 자랑하는 건물입니다. 내부에는 거대한 불상이 자리잡고 있고 역시 회랑으로 둘러져 있습니다. 황룡사 금당에 대한 설명 분위기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곳입니다.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총면적 약 2만 여 평에 중문(中門)·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일탑식가람배치(一塔式伽藍配置)로 알려졌으나, 금당의 좌우에 거의 같은 규모의 건물이 나란히 있고 탑 앞쪽에도 역시 좌우에 종루(鐘樓)와 경루(經樓)로 보이는 건물이 대칭으로 서 있는 독특한 가람구조였음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 건물들은 회랑(回廊)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특히 남회랑이 동·서 회랑보다 더 길게 연장되어 있고, 이 남회랑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북쪽으로 긴 건물지가 연결되어 있는 점 등에서 회랑이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독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특이한 가람배치는 〈삼국유사〉에도 보이듯이 황룡사가 1, 2차에 걸쳐 가람이 형성되었다는 사실과도 일치된다. 현재 절터는 민가와 경작지로 변하여 흔적만 남아 있지만, 특히 신라3보(新羅三寶)인 장륙존상과 9층목탑이 있었던 석조대좌와 심초석이 남아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출처:브리태니커>
황룡사 가람배치는 1976년부터 1983년까지 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그 평면 배치와 가람의 변천상이 밝혀졌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황룡사의 가람배치에 변화가 있으나 기본적으로 1탑식 가람배치이다. 즉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일직선상에 중심축을 두고 자리하며 이들 중심 건물을 둘러싸는 회랑이 있고 중문의 남쪽에는 남문이 있다. 그러나 장육존상과 목탑 등이 조성되고 난 다음 완성된 황룡사 중창가람은 목탑의 북쪽에 중심을 두고 있는 중앙 금당의 좌우측에 규모가 작은 금당이 각기 배치되는 1탑 3금당식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 또 시간의 흐름에 따라 탑의 앞쪽 좌우에 경루와 종루가 대칭을 이루고 배치되기도 하였다. 황룡사의 종루에는 754년(경덕왕 13)에 구리 497,581근을 들여 만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종이 있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몽고의 침입시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조사에서는 금동불입상을 비롯하여 풍탁·금동귀걸이·각종 유리 등 4만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높이 182㎝에 이르는 치미는 황룡사 건물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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