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분황사지는 신라시대 경주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던 황룡사 뒷편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입니다. 지금은 모전석탑인 분황사지석탑을 중심으로 근래에 세운 보광전이라는 불전 하나만 있는 아주 아담한 사찰이지만 신라시대에는 아주 큰 사찰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분황사지 남쪽에는 당시 절터 발굴작업이 진행중에 있으며 분황사 남쪽으로는 옛날 황룡사지가 있었던 장소가 넓은 벌판처럼 보이는 곳입니다.
경주 구황동에 자리잡고 있는 분황사의 외관입니다. 분황사지석탑을 중심으로 분황사에 심은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시원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분황사는 황룡사 뒷편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로 분황사에서 걸어서 황룡사지를 갈 수 있습니다.
분황사 당간지주로 추정되는 경주구황동당간지주입니다. 이 당간지주는 별다른 장식은 없고 거북모양의 받침돌이 특징입니다. 분황사에서 황룡사지로 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이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걸게 되는데, 이 깃발을 꽂는 길다란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을 양 쪽에서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분황사의 것으로 보이는 이 당간지주는 양 기둥에 별다른 조각을 두지 않은 간결한 모습이다. 기둥사이에 놓인 당간의 받침돌이 특이하게도 거북모양이다. 기둥 안쪽면의 아래·중간·윗부분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뚫어 놓았다. 양 기둥 사이에 거북받침돌이 있는 특이한 양식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출처:문화재청>
분황사 남쪽 발굴현장입니다.
분황사지석탑 동쪽편에 자리잡고 있는 원효대사를 위한 비석인 화쟁국사비 받침돌입니다. 추사 김정희가 절근처에서 발견하여 흔적을 새겨놓았다고 합니다.
고려 명종대(1170∼1197) 한문준이 건립한 화쟁국사비의 대석이 남아있는데, 원효대사를 위한 비석이나 시호(諡號 : 죽은 이의 덕을 기리어 붙여주는 호)가 없음을 애석하게 여긴 왕이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김정희가 절 근처에서 발견하여 이를 확인하는 글귀를 받침돌에 새겨두었다. 비는 임진왜란 후까지도 보존되었으나, 지금은 이 받침돌만이 남아있다.
분황사지석탑 북쪽편에 자리잡고 있는 돌우물인 분황사 석정입니다. 삼국통일과 관련된 전설이 내려오는 우물입니다.
분황사 사찰내에 마련되어 있는 돌우물이다. 바위틈 사이로 솟아 오르거나 흘러 내리는 물이 잘 고이도록 바위를 움푹하게 판 뒤, 그 위에 다시 돌을 쌓아 시설해 놓은 모습으로, 겉면은 8각을 이루고, 안쪽의 벽은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다. ‘호국룡변어정’이라고도 불리는 이 우물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분황사 우물과 금학산 기슭 동천사의 동지와 청지라는 우물에는 각각 통일신라를 지키는 세 마리의 호국룡이 살고 있었다. 원성왕 11년(795) 중국 당나라 사신이 이 용들을 물고기로 변신시켜 잡아가니, 두 여인이 왕 앞에 나타나 이 사실을 아뢰며 남편을 찾아줄 것을 아뢰었다. 두 여인의 말을 들은 왕은 사람을 시켜 물고기를 다시 빼앗은 후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설치된 우물로, 조선시대에 와서 불교억압정책에 따라 사찰내의 모든 돌부처의 목을 잘라 이 우물에 넣었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남아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돌우물 가운데 가장 크고 우수한 것이며, 현재에도 사용될 만큼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출처:문화재청>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의 분황사 보광전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모든 중생의 질병을 구제해 준다는 의미의 약사여래불이다. 원래 분황사에는 무게 30만 6700근의 동(銅)으로 만든 신라 최대의 불상인 약사여래좌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1998년에 불상이 있는 보광전을 고쳐 짓기 위해 해체하던 중 발견된 기록을 통해 분황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탔으며 현재의 불상은 1609년에 동 5360근으로 만들었고 보광전은 1680년 5월에 다시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 불상의 왼손 위에 놓인 약그릇 뚜껑 안쪽에 ‘건륭(乾隆) 39년 을미(乙未) 4월 25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건륭 39년은 을미년이 아니라 갑오년이기 때문에 이 기록을 사실대로 믿기는 어렵다. 불상의 얼굴은 둥글고 육감적이어서 세속적인 느낌을 주며, 때로는 어린이의 얼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두껍게 입고 있으며, 옷주름의 표현은 다분히 형식적이다. 손에는 약그릇을 들고 있어서 약사불임을 확인할 수 있다. 전체적인 조형기법과 보광전 보수시 발견된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조선 후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출처:문화재청>
경주 분황사 경내 구석에 있는 석등과 마애불입니다.
분황사에서 발굴된 주춧돌과 분황사지석탑을 쌓았던 돌 등의 석재유물들을 경내 한쪽 구석에 모아놓고 있습니다.
국보로 지정된 분황사지석탑입니다.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신라시대의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삼국사기〉에는 634년(선덕여왕 3) 정월에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석탑을 중심으로 남서쪽에 당간지주가 있고, 탑 북쪽에는 근래에 세운 보광전(普光殿)이 있다. 일찍이 원효는 이곳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華嚴經疎〉를 썼으며, 〈삼국유사〉에 의하면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도〉가 있었고, 755년(경덕왕 14)에 강고내미(强古乃未)가 구리 30만 6,700근을 들여 약사여래상을 만들어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좌전(左殿)의 천수대비 벽화는 영험이 있어서 경덕왕 때 희명(希明)이라는 어린아이의 눈을 뜨게 했다고 전한다. 1101년(숙종 6) 숙종의 조서에 의해 한문준(韓文俊)이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를 건립했다. 그뒤 몽골 침입과 임진왜란 등으로 큰 손상을 입었다. 현존 당우로는 보광전·승당·종각이 있으며, 이밖에 분황사석탑(국보 제30호)·화쟁국사비편(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석정(石井)·석등·건물지의 초석 등이 남아 있다. <출처: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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