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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터

익산 미륵사지 절터, 백제 최대 사찰의 흔적

younghwan 2010. 10. 1.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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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 미륵사지는 백제 무왕이 세운 당시 최대의 사찰로 황룡사에 버금가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미륵사지의 구성은 독특하게 3개의 탑과 3개의 가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면부에는 신앙의 중심이 되는 탑이 중앙에는 목탑, 동.서쪽에는 석탑이 세워져 있고, 그 뒷편에도 3개의 금당터가 남아 있다. 금당 뒷편에는 강당이 있고, 그 뒷편으론 3개의 승방이 자리하고 있다.

 승방의 규모로 볼때에도 상당한 인원들이 이 곳 미륵사지에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시대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그 규모가 조금씩 축소되어오다
없어진 사찰로 보인다.


미륵사지 동탑과 나란히 있는 목탑지.

미륵사지 목탑터는 이 사찰터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으며, 신앙의 중심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목탑지 기단은 북편 중앙의 계단석, 기단 면석, 갑석 일부와  서쪽의 기단석에 의한 한변 18.56m 규모의 정방으로 추정된다.발굴당시 기단 북쪽의 구 지표가 손상되지 않고 남아 있었는데 이곳에서 나중에 보수.정비 등으로 지붕에 올려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통일신라 중기와 후기의 평기와.수막새가 많이 출토되었다. 특히 수막새가 기단에서 북쪽으로 80cm되는 지점에서 기단선과 평행을 이루면서 출토되어 목탑이 소실되면서 그대로 지붕이 내려 앉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출처:미륵사지>

미륵사지 목탑터 뒷편에는 삼금당 중 중금당터를 볼 수 있다. 동.서 금당보다는 규모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일반적인 사찰과 당시 유행했던 장륙전 보다는 규모가 작아 보인다.

미륵사지 서탑 뒷쪽편에 자리한 서금당 터.

미륵사지 동탑 뒷편에 위치한 동금당 터. 중금당 터에 비해 규모가 작아 보인다.

미륵사의 금당은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삼금당이다. 각 금당지에는 남북과 중앙에 돌계단이 있고, 같은 양식의 이중 기단과 높은 초석이 있다. 초석은 한 변이 105cm 정도의 정방형 초반석 위에 긴 정방형의 초석을 올려 놓았는데 밑의 초반석 각 변의 중앙에 위의 긴 초석의 모서리가 위치하도록 하여 초석을 누르는 건물의 전체적인 무게를 8곳으로 분산시켜 받도록 하였다. 삼금당은 모두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칸수는 같지만 각 칸의 너비에 따른 기단의 전체적인 크기는 중금당이 동서 금당의 2배정도이다. 서금당지에서는 토제 나발과 연우 글자가 있는 기와가 나왔다. 이로써 서금당지에서는 고려말까지 건축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미륵사지>

미륵사지 중심 영역인 탑과 금당을 둘러싸고 있는 회랑 터.


금당 뒷편에는 강당터가 자리하고 있다.

강당터와 승방터 사이 공간

미륵사지 강당 뒷편에는 미륵사지에 가장 큰 건물터인 북승방지가 자리하고 있다.

북승방지는 강당지 북편에 강당지와 나란히 동서방향으로 자리한다. 가람의 북쪽편에 자리하고 있어 북승방지로 부르는데 단일 건물지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출처:미륵사지>

남북방향으로 지어진 서승방지 터.

동탑과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동승방지. 건물규모가 상당히 크다.

동서 승방지는 남북 64m로 그 크기가 같다. 발굴당시 승방지에는 구들시설과 아궁이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통일신라시대의 크고 작은 항아리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남쪽 내부에서 당의 연호가 적힌 큰 항아리 편이 발굴되었는데 통일신라 헌안왕 2년임을 알려 주고 있다. 북편 기단 외부에서는 큰 치미가 발굴되었다. <출처:미륵사지>



위성사진을 보면 익산 미륵사지 가람배치를 잘 이해할 수 있다. 전면부에 3개의 탑이 있고, 그 뒤로 3개의 금당, 그 뒷편에 1개의 강당, 그 뒷편에 또 3개의 승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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