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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터

부여 능산리사지,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굴된 백제 성왕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찰

younghwan 2010. 10. 1.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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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대표적인 고분군인 능산리고분군과 백제 수도 사비성을 둘러싸고 있던 부여나성 사이의 공간에 위치한 능산리사지이다. 이 절터에서는 1990년대 이후 백제를 대표하는 유물인 백제금동대향로와 이 절의 창건연대와 내력이 적힌 사리함인 백제창왕명석조사리함이 발굴된 곳이다. 1990년에 오랜 기간에 걸쳐서 발굴이 이루어졌으며, 현재는 절터를 관광자원화하기 위한 정비작업이 진행중인 것으로 보이며, 현재 보수공사의 모습의 보면 옛절의 모습을 재현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곳 능산리사지는 전형형적인 백체 사찰의 가람배치를 보여주는 1탑, 1금당과 강당, 회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절의 규모는 익산미륵사지 등에 비해 크지는 않은 편이며, 능산리 고분군을 지키는 원찰의 의미를 갖는 사찰이라 할 수 있다.


현재 공사가 진행중인 능산리사지 절터 현장. 현장의 모습을 보면 발굴 작업은 완전히 종료했다고 보여지며, 지금은 관광자원화를 위해 절터를 정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절터의 모습으로 남길지, 아니면 옛 사찰의 모습을 복원할 지는 잘 알 수 없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절터 정비 현장을 보면, 목탑지와 금당지에 석재로 기단을 쌓는 것으로 보아서, 황룡사지나 감은사지처럼 절터로 남겨 둘 것 같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능사리사지 절터 입구. 절터 서쪽편을 따라서 토성으로 쌓은 백제 나성이 쭉 이어져 있다.


절터 앞쪽에서 본 능산리사지. 능산리 왕릉과 부여나성 사이의 골짜기를 메꾸어서 절터를 조성했다고 한다. 절의 규모가 웅장하거나 큰 것으로는 보이진 않는다.


절터 뒷쪽 강당이 있는 자리. 목탑과 금당 주위로 회랑이 이어져 있고, 계곡을 메꾸어서 조성한 사찰이라서 배수구가 발달되어 있다.


능산리사지 사찰 출입문과 주위 회랑이 있던 자리.


목탑과 금당이 있던 자리에는 기단을 세우고 있다.


능산리 사지 사찰의 모형. 이 사찰은 성왕의 아들인 창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성왕을 기리기 위해 사찰을 세웠다고 한다.

능산리 절터는 부여능산리고분군(사적 제14호)과 부여나성(사적 제58호) 사이에 위치한 백제시대 절터유적으로, 1992년부터 2000년까지 6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된 이른바 일탑일금당(一塔一金堂)의 전형적인 백제 가람형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1993년 이 절터 내의 공방(工房)으로 생각되는 건물터에서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가 출토되어 백제의 높은 금속공예기술 수준과 예술 역량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향로와 함께 출토된 '백제창왕명사리감(국보 제288호)'에는 사리를 모신 때와 공양자 및 절이 세워진 연대를 알 수 있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매우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사리감에 새겨진 기록으로 보아 이 절은 왕실에서 지은 국가 사찰로 왕릉으로 추정되는 능산리고분군에 축원을 빌기 위한 사찰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창건연대와 더불어 삼국시대의 역사학과 건축공학, 고고학, 미술사학의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출처:문화재청>


1990년대 발굴된 이후 백제의 대표적인 유물로 각광받고 있는 백제금동대향로. 도교적인 여러 장식이 담겨 있는 이 백제금동대향로는 중국남조와 백제의 교류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뛰어난 백제의 금속세공 기술을 파악하게 해준다. 중국에 가면 이런 향로의 모습과 유사한 느낌을 주는 유물을 많이 볼 수 있으며, 이런 유물들 중에서 연대가 빠른 편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백제 나성과 능산리 무덤들 사이 절터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450여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된 백제의 향로이다. 높이 64㎝, 무게 11.8㎏이나 되는 대형 향로로, 크게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며 위에 부착한 봉황과 받침대를 포함하면 4부분으로 구성된다. 뚜껑에는 23개의 산들이 4∼5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피리와 소비파, 현금, 북들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등 16인의 인물상과 봉황, 용을 비롯한 상상의 날짐승, 호랑이, 사슴 등 39마리의 현실 세계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 밖에 6개의 나무와 12개의 바위, 산 중턱에 있는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폭포, 호수 등이 변화무쌍하게 표현되어 있다. 뚜껑 꼭대기에는 별도로 부착된 봉황이 목과 부리로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편 채 힘있게 서 있는데, 길게 약간 치켜 올라간 꼬리의 부드러움은 백제적 특징이라 하겠다. 봉황 앞 가슴과 악사상 앞뒤에는 5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몸체에서 향 연기를 자연스럽게 피어오를 수 있게 하였다. 몸체는 활짝 피어난 연꽃을 연상시킨다. 연잎의 표면에는 불사조와 물고기, 사슴, 학 등 26마리의 동물이 배치되어 있다. 받침대는 몸체의 연꽃 밑부분을 입으로 문 채 하늘로 치솟 듯 고개를 쳐들어 떠받고 있는 한 마리의 용으로 되어 있다. 이 향로는 중국 한나라에서 유행한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은 듯 하지만, 중국과 달리 산들이 독립적·입체적이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창의성과 조형성이 뛰어나고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종교와 사상적 복합성까지 보이고 있어 백제시대의 공예와 미술문화, 종교와 사상, 제조기술까지도 파악하게 해 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출처:문화재청>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 이 절터 중앙 목탑자리에서 출토된 것으로 창왕때 성왕의 딸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사찰에서 목탑에 보존된 신앙의 중심이었다고 보여진다. 후대에 발굴된 많은 사리함의 예를 볼때 사리감 내부에 있던 유물도 상당히 화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 때 사리를 보관하는 용기로, 능산리 절터의 중앙부에 자리한 목탑 자리 아래에서 나왔다. 출토 당시 이미 사리감은 폐기된 상태였으므로 사리 용기는 없었다. 사리감은 위쪽은 원형, 아래쪽은 판판한 높이 74㎝, 가로·세로 50㎝인 터널형이다. 감실 내부의 크기는 높이 45㎝ 정도로 파내어 턱을 마련하였는데 내부에 사리 장치를 놓고 문을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감실의 좌·우 양 쪽에 각각 중국 남북조 시대의 서체인 예서(隸書)풍의 글자가 10자씩 새겨져 있는데, 명문(銘文)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제창왕십삼년태세재 정해매■공주공양사리(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 丁亥妹■公主供養舍利)로서, 이 사리감은 성왕(聖王)의 아들로 554년 왕위에 오른 창왕(昌王)[위덕왕(威德王)]에 의해 567년 만들어 졌으며, 성왕(聖王)의 따님이자 창왕(昌王)의 여자 형제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사리감은 백제 역사 연구에 새로운 금석문 자료로서 백제와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며, 사리를 봉안한 연대와 공양자가 분명하고, 백제 절터로서는 절의 창건연대가 당시의 유물에 의해 최초로 밝혀진 작품이다. <출처:문화재청>



능산리사지가 있는 능뫼골은 백제 왕릉이 있는 곳으로 기록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일인들에 의해 이곳의 고분군들이 대부분 발굴되어 알려지게 되고, 고분군 옆에는 사비시대 부여 도성의 외곽성인 나성이 지나가고 있어 관심도가 높았던 지역이었다. 이들 양 유적에 대하여는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존되어 왔으나 양 유적 사이에 있었던 13필지의 계단식 논에 대하여는 사유지로 남아 있어 관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85년 능산리서고분 아래에 능산리 백제고분 모형관이 만들어지게되고, 서고분군 주위에 배수로를 공사하던 중 몇점의 연꽂무늬수막새가 신고되어 논자리를 포함한 지역에 백제시대 건물터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던 지역이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정부의 개발계획사업의 일환으로 13필지의 논이 매입되었으며, 이에 따라 이곳을 정비하려는 사업에 착수하게 되었고, 그 1차 조사로서 1992년 시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시굴조사 결과 하부에 백제시대 유적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1993년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1993년부터 시작된 정식적인 발굴조사에서 백제금동대향로와 창왕명석조사리감이 출토되면서 주복받게 되었다. 조사결과 능산리사지는 나성과 능산리고분군 사이의 협소한 계곡에 있는 소택지를 메꾸어서 만들었다. 1993년부터 1997년까지 실시한 발굴조사는 절의 중심 건물터와 이 건물들을 둘러싼 대배수로가 조사되었다. 절의 중심 건물은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자오선상에 일직선을 이루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중심 건물들은 회랑으로 둘러져 있었는데, 서쪽 회랑의 북쪽에는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된 공방터가 있다. 대배수로의 끝에는 나무다리와 돌다리가 있어 절로 들고나는 출입시설의 역할을 하였다. 1999년부터 2002년까지는 절의 중문 남쪽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중문 남쪽에 대한 조사에서는 도로시설과 다양한 형태의 지하배수시설이 확인되었다. 특히 절터 남쪽구역 서쪽 대배수로의 나무다리 인접구역의 하부 층위에서 능산리사지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이 배수로 내부에서는 나무판에 먹글씨를 남긴 목간이 많이 발견되어 문자기록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백제역사 연구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출처:부여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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