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군수리사지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성 남쪽에 위치한 궁남지 한쪽편에 있는 사찰이다. 이 사찰터는 일제강점기에 사찰터 중에서는 조기에 발굴이 시작되어 백제 사찰의 가람배치인 1탑, 1금당의 가람배치가 처음 확인된 사찰이다.
이 곳에서는 유물이 많이 발굴되었는데 목탑터 주변에는 금동보살입상과 석조여래좌상을 비롯하여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이 곳에서는 백제와 일본의 교류를 보여주는 칠지도가 발굴되었다.
부여 궁남지 서남쪽에 위치한 군수리사지. 중앙에 목탑터가 있고, 그 뒤로 금당터가 있다.
군수리사지 가람배치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목탑터. 이곳에서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군수리사지 뒷쪽편의 금당터와 강당터. 원래 절터의 가람배치에 따라서 절터를 재정비하는 공사가 진행중인 것으로 보인다.
군수리사지 동쪽편에는 백제 궁궐 정원의 백미라 할 수 있는 궁남지가 있다.
군수리사지 서쪽편 종루 또는 경당 터로 추정되는 건물터
군수리사지 절터 입구
부여박물관에 전시중인 일본 칠지도 모사품. 군수리사지에서는 일본 칠치도와 유사한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부여박물관에서 전시중인 군수리사지에서 출토된 변기용도의 토기
부여 군수리에 자리하고 있는 백제의 절터로, 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1935년 일본 사람에 의해 조사되었는데, 그 결과 중문·목탑·금당·강당 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된 1탑 1금당의 구조임이 밝혀졌다. 백제 사찰에서의 1탑 1금당의 가람배치는 이 절터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는데, 이후 계속된 조사를 통해서 백제의 기본적인 가람배치로 알려졌다. 금당터의 기단은 기와를 쌓아 만든 것이 특징이며, 유물은 절터에서 골고루 출토되었다. 먼저 강당터 남쪽에서 금동관 조각이 나왔고, 금당터 주위와 탑터에서는 약 1,150점의 옥과 금당 서쪽에서는 금동제방울·구두 모양의 금구가 출토되었다. 또한 연꽃무늬·덩굴무늬가 아름답게 조각된 상자 모양의 벽돌과 금제고리·작은 구슬을 비롯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목탑의 중심부에서는 군수리 금동미륵보살입상(보물 제330호)·군수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29호)과 칠지도·철못·삼족토기를 비롯한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이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칠지도이다. 칠지도는 중심에서 양쪽으로 각각 세가지씩 칼이 뻗어있어 7개의 칼날을 가지고 있는 칼이다. 이와 비슷한 백제 칠지도 하나가 일본에 있어 백제와 일본의 문화교류의 한 단면을 말해주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일제강점기 발굴조사
유적은 일제 강점기인 1935년 일본인에 의해서 부여지역 일대를 조사하던 가운데 군수리 주변 민가에서 건물지 주춧돌과 옛 기와들이 수습된 뒤 발굴조사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가람의 구조는 탑, 금당, 강당이 남북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고, 그 외곽으로 회랑이 둘러져있다. 특히 강당지 좌.우로 장방형 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 그 위치로 보아 종루지 및 경당지로 추종되고 있다. 목탑지 심초석 상면에서 불상 2점이 출토되에 백제 사비기에 축조된 사찰 유적임이 판명되었다. 출토유물로는 불상.장신구.치미.금속류.목걸이 등 다양하다. 당시 발굴조사는 약 45일간 단기간에 이루어져 사찰의 전체적인 규모확인에만 치중하였으며 발굴경과에 대한 보고내용도 간략히 간행된 관계로 유적의 정확한 위치와 구체적인 규모는 알 수 없었다. <출처:부여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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