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박물관 2층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예술로서 서예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서예는 붓으로 선의 움직임, 변화, 힘 그리고 감정을 보여주며 사람의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예술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학문과 함께 정신수양의 방도로 여겨왔었다. 물론 현대에 와서는 학문과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예술로서의 의미는 많이 퇴색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분야 중의 하나이다.
우리나라 서예는 중국에서 한자를 도입한 기원전 2세기 이래로 중국과 문화교류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 왔으며, 오랫동안 중국의 서예의 변화는 우리나라 지식인들에게는 끊임없이 지적이 자극이 되어 왔으며, 우리 나름대로의 서예문화를 형성해 왔다. 서예로 명성을 떨친 사람은 신라의 김생에서부터 안평대군, 한석봉, 추사 김정희 등 수많은 명사들이 오랜 기간 동안에 끊임없니 존재해 왔다. 서예의 서체는 읽기 쉽고, 쓰기 쉬운 형태로 끊임 없이 발전해 왔다고 하며 대표적인 서체로는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가 있다.
서예는 문자로 표현하는 예술이다. 먹물을 머금은 붓으로 선의 움직임, 변화, 힘 그리고 감정을 보여주며 동시에 문자의 의미로 정신을 전달한다. 서예는 예로부터 지식인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했던 중요한 교양의 하나였으며, 아름다운 글씨는 마음과 정신에서 나온다고 여겼다. 그런 까닭에 서예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글씨를 열심히 써야 할 뿐만 아니라 문학, 역사, 철학 등 학문을 깊이 공부하고 부단히 인격을 닦아서 고결한 정신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한국의 서예는 중국에서 한자를 수용한 기원전 2세기 무렵 시작되었다. 순수한 문화 교류의 차원에서 뿐 아니라 전쟁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도 중국의 서예는 끊임없이 우리 서예 문화의 자극원이 되어 한국 서예를 형성한 토대가 되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의 글씨는 한국 서예의 기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자료이며 통일신라 김생의 글씨는 우리 서예의 커다란 줄기가 되었다. 고려 승려 탄연.조선의 한호.이광사.김정희 같은 인물들은 한국 서예를 진취적으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선조들의 발자취는 한국.중국의 서예라는 경계를 넘어서 보편적 예술성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서예문화는 조선 말의 개화와 일제의 침략 및 서구문화의 급격한 유입 등으로 약화되었다. 정신의 고도한 시각적 표현인 서에는 기예의 차원으로 전락하는 침체기를 맞았으며 현대문화에 밀리어 위기를 겪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오늘날의 서예가와 서예 연구자들은 한국 서예 문화이 전통회복과 계승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서예는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법고창신'의 정신을 바탕으로 발전하여 왔다. 오늘날 서예문화의 새로운 발전을 위하여 서예실에서는 대표적인 서예작품을 전시하여 옛 문화와 정신을 바탕으로 변화와 창조를 이끌어내는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전서는 고대 한자에서 발전한 서체이다.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의 문자 개혁 이전 글씨체는 대전, 문자개혁 이후 글씨체는 소전이다. 대전체는 모양이 다양하고 변화가 크며, 소전체는 네모반듯하고 고르며 글씨 획도 단정하다. 갑골문, 종정문은 전서에 포함된다. <출처:중앙박물관>
안평대군이 쓴 세종영릉 비액, 전서, 1452년. 가장 오래된 글씨체인 전서는 고풍스러움을 강조하기 위해서 비석이나 도장 등에 많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글씨는 세종 임금의 영릉 신도비의 비액 탑본이다. 안평대군의 전서를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로서 소전을 법도에 맞게 고른 필치로 썼다. 이 비석은 경기도 광주에서 여주로 능을 옮길 때 땅에 묻었던 것으로 1574년에 발굴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오세창이 쓴 기와.벽돌.금속에 새긴 글씨, 전서, 오세창, 1925년
오세창은 미술품에 대한 높은 감식안을 지녔으며 서예가로서 이름이 높았다. 특히 전서를 잘 썼으며, 옛 기와와 벽돌, 금속기 등에 새겨진 전서를 연구하였다. 이 글씨는 중국 한대의 기와와 벽돌 및 주대의 제기, 무기 등에 새겨진 글씨들을 쓴 것으로, 대전 서체의 다양함을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2005년 한국박물관회가 서울 옥션으로부터 구입하여 중앙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전서체에서 정리된 예서체는 오늘날으 한자 글씨 형태를 띤다. 중국 전한 시대 예서체인 고예는 정사각형에 가깝고 전서의 필획으로 쓴다. '팔분서'라고도 하는 후한 시대 예서인 팔분예서는 모양이 납작하고 물결 모양의 가로 획이 특징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김석준이 쓴 글씨, 예서, 김석준, 19세기, 이홍근 기증
소당 김석준은 추사 김정희의 문인 이었던 이상적의 제자였다. 그러나 추사 김정희로부터 직접 서체지도도 받고 소장품도 빌려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김정희는 그의 글씨를 높이 평가했는데, 그의 글씨가 안진경체의 출중한 뜻을 깊이 터득하였다고 평했다. 이 작품은 청나라 여류문학가인 전연인이 남편인 백야 장기에게 한 말을 쓴 것으로 예서체와 해서체를 절충하였다. 이홍근 선생이 1987년에 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정자체인 해서는 예서를 정리한 것이다. 한자의 표준 서체이기도 한 해서체는 각 획이 짜임새 있게 정리되어 읽고 쓰기가 좋다. 해서는 전서와 예서를 비롯한 각 서체의 장점을 모두 포함하고 있어 서예를 배울 때 특히 공부가 많이 되는 서체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왕희지가 쓴 <동박삭호찬>, 해서, 왕희지, 제주박물관 소장
중국 동진의 서예가 왕희지는 서예를 예술로 승화시켜 품격 높은 문인 문화의 하나로 만든 서성이라 일컬어진다. 이 서첩은 왕희지의 해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글씨이다. 원명은 <한 태중대부 동방선생화찬>이며 보통 <동방삭화찬>으로 알려져 있다. 왕희지의 해서는 특히 15세기를 지나며 조선 서예의 변화의 모색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이후 석봉 한호의 서체에도 영향을 주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석봉 한호가 쓴 서첩, 해서, 한호, 1602년
석봉 한호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명필로, 중국의 왕희지체를 연구하여 이를 바탕으로 특유의 석봉체를 이루었다. 서예의 감식안이 있었던 선조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으며, 국가의 여러 문서와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다. 뛰어난 문장가였던 최립과 매우 가까웠는데, 서로 인척이었을 뿐 아니라 둘 다 한미한 집안에서 나서 뛰어난 재주로 입신하여 서로 의지하는 사이였다. 이 서첩은 한호가 최립에게 써 준 것으로, 오른쪽 면은 한호가 선조에게 하사받은 별루에 대해 읊은 시 <구룡연>을 왼쪽 면은 그 시에 대하여 칭송하는 최립의 지문을 쓴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성종임금이 부채에 쓴 글씨, 해서, 15세기 후반. 정자체에 속하는 해서는 역대국왕들의 글씨가 많이 남아 있는 것 같고, 가장 많이 쓰이는 글씨체가 아닌가 생각된다.
작은 부채 면에 쓴 성종 임금의 해서 글씨이다. 성종의 글씨는 안평대군의 글씨와 매우 비슷하야, 남아 있는 글씨 자료가 거의 없는 안평대군의 글씨를 이해하는 좋은 기준이 된다. <출처;중앙박물관>
정조 임금이 쓴 <문상정사에 제함>, 해서, 1789년, 보물 1632호. 정조대왕이 쓴 이 글씨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힘있고, 단정하고, 세밀한 글씨체에서 정조대왕의 얼굴과 성품이 보이는 듯 하다.
1789년에 제작된 것으로 정조가 정화 정민시의 문상정사에 대하여 지은 어제어필 칠언시다. 연청색과 상아색 비단으로 꾸민 조선후기 궁중표장을 보여주고 있다. 서체는 두터운 필치에 파임이나 갈고리부분에서 안진경의 유풍이 두드려져 있다. 짜임새가 긴밀하며 약간 직사각형인 글씨골에 맞도록 여백과 행이 적절하고 시원하게 조절되어 있다. 만년의 대표작으로 예술성이 뛰어나 정조어필의 최고작으로 평가된다. 운룡문이 장식된 종이에 썼으며, '규장지보', '홍재', '만가지가'라 쓴 도장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정조 임금이 쓴 <임지로 떠나는 철옹부사에게>, 해서, 정조, 1796년
정조가 철옹(지금의 영변) 부사로 임명되어 떠나는 서형수에게 이별을 아쉬워하며 내린 칠언 절구의 시이다. 위쪽에는 지방 행정에 힘써 달라는 당부의 편지와 함께 네가지 약재와 서른 자루의 부채를 선물로 보낸다는 목록을 써 놓았다. 정조의 글씨는 한석봉체에서 발전한 양송(송시열, 송준길)의 서체에 기반을 두었으며 여기에 안진경의 두툼한 필획의 멋을 곁들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윤순이 쓴 글씨, 해서, 1737년
윤순이 중국 제.양나라의 대표적인 시문을 엮은 책인 <문선>에서 옛 시 12수를 골라 쓴 것이다. 글씨는 해서, 행서, 초서체로 쓰여졌으며, 북송대 서체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윤순의 58세때 작품으로 격조와 감각이 잘 어우려졌다. <출처:중앙박물관>
인목왕후가 쓴 <민우시>, 해서, 1712년 만든 모본, 17세기
선조의 비 인목왕후는 선조 임금의 글씨 영향을 받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성 서예가였다. 인목왕후의 글씨는 선조 임금의 글씨 및 석봉체 계열 글씨이다. 이 작품은 자신으 상황을 구박받은 늙은 소에 비유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당당한 인상을 주는 품격 높은 해서 글씨로서 이 시기 글씨의 경향답게 굵고 강한 필획의 힘이 인상적이다. 글씨 왼쪽 하단에는 숙종 임금이 인목왕후의 이 글씨를 찾아낸 감회와 글씨의 보전을 위해 판각을 하게 한 내용을 발문으로 남겼다. <출처: 중앙박물관>
행서는 해서의 획을 약간 줄여서 흘려쓴 서체이다. 흘려 쓰지만 읽기에는 크게 어렵지 않으며, 초서와 같은 생동감이 있다.
원교 이광사가 쓴 글씨, 행서, 18세기. 당대의 명필이 쓴 글씨답게 단정하면서도 화려한 느낌을 주는 글씨체이다.
한호 이후 조선 후기 서풍의 조선화에 마침표를 찍은 인물로 평가되는 이광사의 행서이다. 이광사의 호는 원교.수북이고 자는 도보이다. 전시되어 있는 작품은 이광사가 어떤 그림을 본 후 중국 고개지와 한비자의 화론을 인용하며 높게 평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행서는 빠른 붓놀림과 글씨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동감이 뛰어난 작품으로, 이광사의 스승이었던 윤순(1680~1741)의 영향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병인년, 즉 이광사가 42세에 쓴 글씨임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송시열이 쓴 적취병, 행서, 17세기. 다른 글씨에서도 자신만의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면이 있지만, 행서부터 자신만의 정신세계를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강하게 드러나는 것으로 보인다.
적취병은 삼각산 동쪽 우이봉에 있는 아름다운 폭포다. 송시열은 힘차고 활달한 행서를 잘 썼다. 또한 이런 글씨들을 바위에 새겨 남기기도 하였다. 이 서첩에는 우이동 구곡의 대표적인 산과 계곡 이름들이 담겨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쓴 글씨, 행서, 1882년, 이홍근 기증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조선 후기 서단에 새로운 흐름을 창도한 추사 김정희를 진심으로 추승하여 그의 자신감 넘치는 필치를 터득한 제자이다. 강한 골기를 지닌 스승의 서풍에 비해 보다 윤택하고 부드러운 필치를 보여주고 있다. 옆에는 작은 글씨로 윤씨 성을 가진 선비의 청에 응하여 글씨를 쓰지만 바로 잡아 달라는 내용과, 자신이 62세가 되는 해임을 적었다. 이홍근 선생이 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이명한이 쓴 오언시, 행초서, 이명한, 조선 17세기. 행초서라는 글씨체를 보여주고 있다.
백주 이명한(1595~1645)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월사 이정구의 아들이다. 조선을 대표하는 시인의 한사람이기도 하였다. 이명한은 비교적 필획에 살이 풍성하고 속도감 있는 필치로 썼으며, 그의 작품은 선조 임금 시기 서예의 특징이기도 한 강하고 굵은 필치로 글씨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초서는 획을 최대한 간략하게 줄인 흘림체이다. 속도감과 선의 변화를 표현하는 데 가장 알맞은 서체로, 흥취와 예술성을 드러낸 초서체 작품들이 많다. 그러나 변확 크고 주관적인 표현이 많기 때문에 읽고 쓰기는 매우 어렵다.
윤순거가 쓴 풍화설월, 초서, 윤순거, 조선 17세기. 글씨에서 예술성을 강조하고하는 초서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윤순거는 조선시대 초서의 대가로 손꼽힌다. 병자호란 때 척화죄로 부친과 숙부가 유배되어 순절하자 벼슬을 그만 두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風花雪月' 대자 초서는 속도감의 활달함과 감각적인 면을 적절하게 표현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동토 윤순거 선생이 쓴 <무이구곡가>, 초서, 윤순거, 17세기 중반
윤순거 선행이 주자의 <무이구곡가>를 쓴 것이다. 선생은 초서를 잘 썼으며 특히 변화을 중시하여 광초를 바탕으로 하여 자신의 글씨를 이루었다. 힘과 근골을 중시하는 17세기 서예 분위기를 반영한 선생의 글씨에서 유연하면서도 강한 필치를 볼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왕과 왕실의 서예
어필은 왕의 글씨이다. 왕은 왕자 시절부터 이상적인 왕이 되기 위하여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학문을 익혔으며, 서예를 통해 정신과 마음을 꾸준히 닦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서예에 대한 소양이 깊었다. 어필은 그 시대의 글씨에 대한 선호도와 경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왕은 당시의 서예 분위기를 주도할 수 있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왕실에서는 선진 서예 문화의 흐름과 중국의 새로운 자료 등으 가장 먼저 접할 수 있었으며, 왕은 바로 그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서예의 흐름을 이끌었던 여러 왕들 가운데 조선의 선조는 가장 대표적이다. 그는 석봉 한호라는 서예가를 발탁했을뿐 아니라 석봉체가 나라의 서체가 될 수 있도록 <한석봉 천자문>을 제작하여 전국에 보급하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종조는 당시의 서예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왕들 뿐 아니라 조선 왕실에는 송설체의 유행을 이끈 안평대군 이용, 서예와 그먹문 연구를 증신시킨 낭선군 이우, 서화에 이름을 떨쳤던 흥선대원군 이하응 같은 유명한 인물들이 있었다. 이처럼 임금과 왕실의 글씨는 한국 서예의 흐름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여 서예 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선조 임금이 쓴 '적선', 해서, 판각탑본, 16세기
필획이 굵고 당당한 큰 글씨의 해서체이다. 특히 큰 글씨를 자신감 넘치게 잘 썼다. 또한 글씨는 잘 쓰는 인물을 찾는데 있어 자신의 서예적 안목으로 골라낼 정도로 예리한 감각과 눈을 가졌던 임금으로, 명필 석봉 한호로 하여금 <해서천자문>을 제작하여 전국 서당에 보급시켰다. 선조 임금의 이러한 큰 글씨는 명필로 이름 높았던 딸 정명공주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출처:중앙박물관>
김정희의 안평대군 사경첩에 대한 논평, 김정희, 19세기
김정희가 안평대군의 글씨로 전해오는 사경첩의 진위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밝힌 글이다. 단정하고 정갈한 해서체로 청 옹방강의 영향이 많이 보이는 이 글씨는 언제 쓴 것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글의 내용으로 대략의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글 내용 중에 1824년 봄 석공이 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에서 창림사 탑을 깨트렸을 때 출토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39세인 1824년 이후에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언급된 사경첩은 이 글의 앞쪽 부분에 전한다. 개인소장품으로 2005년부터 중앙박물관에 기탁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추사 김정희가 쓴 서한시대 거울 명문, 예서, 김정희, 19세기
이 서첩은 추사 김정희가 서한시대 거울에 새겨진 5개의 명문을 옮겨 쓴 것이다. 김정희는 한나라 청동 거울에 새겨진 글씨를 깊이 연구하여 자신의 서체를 확립하는데 응용하였는데, 파임이나 삐침이 분명한 동한의 예서보다는 전서의 형을 지닌 서한의 예서를 높이 평가했다. 한나라 거울 글씨는 추사체가 이루어지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출처:중앙박물관>
시문을 새긴 양면 벼루, 19세기
추사 김정희 선생의 종가에서 전래된 벼루이다. 위아래 양쪽 면 모두 먹을 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한쪽 면에는 작은 글씨의 시문이 새겨져 있다. 예로부터 벼루는 문인들의 필수품이자, 감상의 대상이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반드시 먼저 벼루부터 고른 후에야 글씨를 쓸 수 있다.'고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인장을 찍어 모은 책, 인보
추사 김정희 선생의 인장, 전서, 김정희, 19세기
추사 김정희 선생의 종가에서 전래된 인장 중 일부이다. 인장을 새기는 작업을 전각이라고 하는데, 인장에는 자, 호, 이름, 그리고 좋은 글귀들을 새겨 넣는다. 인장은 직접 새겨서 사용하기도 하지만 전각의 대가에게 부탁을 해서 새겨 받거나, 선물을 받는 경우도 많다. 추사 선생은 워낙 전각을 잘 하는 분이었는데, 이 인장들 중에는 선생께서 직접 새긴 것과 중국의 학자들 및 친한 문인들로부터 선물 받은 것들도 있는 듯 하다. <출처:중앙박물관>
중국 서예의 발전
우리나라 서예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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