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 승화된 서예를 이야기 할 때에 사람들은 많은 명필을 떠올릴 수 있다. 대표적인 중국의 명필로는 왕희지를 꼽을 수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의 명필 김생, 조선시대 석봉 한호, 추사 김정희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 중국의 왕희지가 쓴 글씨는 한자체 표준이라 할 정도로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석봉 한호의 글씨체가 선조의 글씨 보급정책에 따라 '천자문'을 통해 우리생활 깊숙히 자라잡고 있다. 아마도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한자 글씨는 그의 글씨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명필들의 글씨는 '집자'란 형태로 많이 남아 있다. '집자'란 필요한 글자를 선택하여 조화롭게 연결해서 문장을 만드는 것인데, 활자인쇄나 비석의 글씨등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 각지에 남아 있는 비석들에는 집자해서 만든 글씨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중에는 현재로는 글씨가 거의 남아 있지 않는 중국 동진시대의 명필 왕희지의 글씨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역사로만 알고 있던 신라 명필 김생의 글씨 또한 <태자사 낭공대사 비석>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집자비석
'집자'란 필요한 글자를 선택하여 이를 조화롭게 연결하는 작업이다. 문장을 돋보이게 하거나 높이 기리기 위하여 옛날부터 명필들의 글씨를 집자하여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대체로 집자는 비석을 세우는 데 많이 이용하였다. <무장사 아미타불을 만든 내용을 쓴 비석>,<흥법사 진공대사 비석>,<태자사 낭공대사 비석> 등은 한국의 대표적인 집자 비석이다. 집자는 마치 한 붓으로 쓴 듯 글자 간의 연결이 자연스럽고 일정해야 한다. 또한 한 사람의 서예가가 쓴 똑같은 글자라도 글씨의 흐름과 분위기가 모두 같지 않기 때문에, 알맞은 글자를 선택하여 연결하는 데 많은 시간이 든다. 중국 당나라의 승려 회인은 왕희지의 글씨를 무려 25년 동안 집자하여 <대당삼장성교서> 비석을 완성하였다. 집자 비석은 그 내용으로 제작의 배경을 알 수 있다는 점 뿐 아니라 돌에 새겼기 때문에 글씨가 오랜 세월 보전된다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또 집자된 글씨는 당시 중요한 영향을 끼친 서예의 흐름을 보여주기 때문에 서예사와 시대별 서체 연구를 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출처:중앙박물관>
역사로만 남아 있는 신라 명필 김생의 글씨를 볼 수 있는 <태자사 낭공대사 비석>
태자사 낭공대사 비석 뒷편, 김생 행서 집자, 고려 954년
통일신라의 승려 낭공대사 행적을 기리는 비석이다. 뒷면의 글은 낭공대사 문하의 법손, 즉 직계 제자인 승려 순백이 지었다. 뒷면에는 낭공대사께서 입적하셨을 당시에 세장이 어지러워 비석을 세우지 못하다가 고려 광종 임금 때에 비로소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는 내용을 비롯하여 낭공대사 문하의 사람들과 최인연(최언위)에 대한 서술 그리고 이 비석의 건립연대(954년) 및 건립에 관계한 인물들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태자사 낭공대사 비석 앞면, 김생 행서 집자, 고려 954년
앞면에는 낭공대사의 일생과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글은 통일신라 및 고려의 문장가로 유명한 최인연(최언위)이 지은 것이며, 글씨는 승려 단목이 김생의 행서 글씨를 집자하였다. 글씨 크기는 작지만 힘찬 필치로 쓴 김생의 행서를 잘 보여 주는 이 비석은 한국 서예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출처:중앙박물관>
이 비석의 정식 명칭은 '태자사 낭공대서 백월서운탑비'이다. 통일신라의 효공왕과 신덕왕의 국사였던 낭공대사를 기리는 비석으로 고려 광종 5년(954) 지금의 경북 봉화군 태자사에 세워졌다. 비석의 글씨는 김생의 행서를 집자한 것인데, 중국 왕희지와 안진경의 글씨체 등 8세기 당시 통일신라 서예의 경향을 여실히 반영하면서도 굳세고 강건한 힘을 집어 넣어 활달한 필치와 기운이 훌륭히 표현되었다. 집자는 고려의 승려 단목이 하였다. 비석 앞면에는 낭공대사의 일생과 업적이 기록되었는데, 글은 최인연(고려때 최언위로 개명)이 썼다. 뒷면에는 승려 순백이 쓴 후기가 새겨져 있다. 한국 서예의 신품사현 가운데 한 사람인 김생은 '해동의 서성', '신라의 왕희지'로 추앙받던 명필로서 한국 서예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김생의 글씨는 전하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 낭공대사 비석은 어느 작품보다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출처:중앙박물관>
신라 명필 김생의 글씨
성덕대왕 신종에 새져긴 글씨, 통일신라 771년
성덕대왕 신종(국보 29호)은 한국에서 가장 큰 종이다. 봉덕사종, 에밀레종으로도 불리는 이 종은 신라 33대 성덕왕의 공덕을 기리고, 왕실과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원래 성덕왕의 아들인 경덕왕이 이 종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당대에 이루지 못하고 혜공왕이 아버지 경덕왕의 뜻을 이어 구리 12만근을 들여 완성하였다. 아름다운 비천상으로 유명한 성덕대왕 앞뒷면에는 1천여 자의 양각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여기에는 종을 치는 목적, 이 신종을 제작하게 된 연유 그리고 제작에 참여한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다. 앞면에 있는 김부원이 쓴 글씨는 균형이 잘 잡힌 해서이며, 뒷면에 있는 요단의 글씨는 날카로운 필치의 글씨이다. 살이 적당히 붙은 필획은 중후한 느낌을 주어 커다란 종과 잘 어울린다. 비록 직접 쓴 글씨는 아니더라도, 통일신라의 문화를 대표하는 성덕대왕 신종에 새겨진 이 글씨는 당시 서예의 수준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성덕대왕 신종 뒷면에 새겨진 글씨탑본, 해서, 771년. 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종에 새겨진 글씨로 상당히 잘 쓴 글씨라고 하며, 통일신라시대의 서예의 경향을 보여주는 글씨라고 한다.
성덕대왕 신종 뒷면에는 찬시 및 종을 만든 이들의 직함과 이름 등이 있다. 글을 지은 이는 신종 앞면의 글을 지은 한림랑급찬이며, 글씨는 대조 벼슬을 한 요단이 썼다. 이 찬시 역시 앞면과 같이 혜공왕의 위엄을 찬양하고, 경덕왕과 혜공왕의 효심으로 만들어진 신종의 장중한 면모와 아름다운 소리에 대한 찬사, 그리고 신종을 제작한 위대한 업적의 빛남과 영원함을 기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마모가 심하여 또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으나, 글씨는 날카로움을 약간 드러낸, 유연하고 자연스러운 필치의 해서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성덕대왕 신종 앞면에 새겨진 글씨 탑본, 해서, 통일신라, 771년
성덕대왕 신종 앞면의 글은 부처님께서 종을 높이 단 까닭, 성덕대왕에 대한 칭송, 종을 만든 경덕왕과 혜공왕의 효심을 기록하며, 신종의 소리로써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빌고 깨달음을 얻어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기를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혜공왕 때 한림랑급 벼슬을 하던 김필요가 글을 짓고 글씨는 한림대서생 벼슬을 하던 김부원이 썼다. 글씨의 마모가 심한 편이지만 균형이 잘 잡힌 해서체로 썼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 8세기 서예에서 보이는 특징이기도 한 여유있는 필획과 유연한 필치는 커다란 종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인각사 보각국사 비석 탑본, 왕희지 행서 집자, 고려 1295년.
인각사 보각국사 비석은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을 기리기 위해 1295년에 세워졌으며, 일연 스님의 삶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왕희지의 행서를 집자한 비석으로 크게 훼손되어 2006년에 복원하였다. 탑본의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출처:중앙박물관>
흥법사 진공대사 비석 탑본, 당 태종 행서 집자, 고려 940년
진공대사 충담을 기리며 원주 흥법사에 세운 비석의 탑본이다. 탑본 연대는 알 수 없다. 글은 고려 태조가 지었고, 최광윤이 중국 당 태종의 행서를 집자하여 만들었다. <출처:중앙박물관>
흥법사 진공대사 비석, 당태종 행서 집자, 940년
흥법사 진공대서 탑비에 새겨진 당태종의 행서 글씨.
흥법사 진공대사 탑비
이 비석은 진공대사 충담을 기리며 세운 비석이다. 전시되어 있는 것은 비석의 아랫면이다. 비석의 글은 진공대사를 깊이 존경하던 고려 태조가 지었고, 최광윤이 중국 당나라 태종의 행서를 집자하여 만들었다. 뒷면에는 고려 태조에게 올렸던 진공대사의 글이 구양순의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당 태종은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행서에 뛰어났다. 귀부와 이수는 현재 강원도 원주시 흥법사 터에 있고 진공대사 탑과 석관은 중앙박물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무장사 아미타불을 만든 내용을 쓴 비석, 왕희지 행서집자, 801년
이 비석은 이른 시기인 통일신라시대에 왕희지 글씨를 집자하여 만든 것으로 원본에 가까울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듯 하다.
신라 39대왕 소성왕의 왕비 계화왕후가 소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무장자 아미타전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신 후 그 내용과 과정을 새긴 비석이다. 무장사 비석은 중국 왕희지의 행서를 집자하여 새긴 집자 비석으로 매우 중요한 왕희지 글씨 연구자료이다. 이 비석은 홍양호와 추사 김정희가 찾아낸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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