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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고구려실] 고구려의 무덤, 금동관

younghwan 2011. 4. 14.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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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2세기 이전에 성읍국가에서 출발한 고구려는 부여에서 남하한 주몽세력에 의해 규모가 크게 확대되었으며 점차 주변지역을 아우르면서 삼국 가운데에서 제일먼저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고구려는 환인성 오녀산성에서 출발하여, 압록강 중류에 지안시에 위치한 국내성을 근거지를 수도로 하다가 대동강 일대에 있던 낙랑군을 몰아내고 동북아시아의 강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고구려의 유적지는 압록강 유역의 요녕성 환인현과 길림성 집안시에 도성, 무덤, 비석 등이 많이 남아 있으며, 마지막 도읍지인 평양성 일대에도 다양한 벽화가 그려진 고분들이 널리 분포되어 있다. 비록 지금은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에 위치하고 있지만, 상당한 수준의 유물과 유적들을 남겨놓고 있다. 특히 지안시 일대의 유적들은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고구려의 무덤
고구려 무덤은 돌무지무덤과 흙무지무덤으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 돌무지무덤은 압록강 유역에 집중되어 있는 고구려 전기무덤형식이다. 지상에 돌을 깔고 그 위에 주검을 안치한 후 다시 돌을 덮어 만들었으며, 무기단식에서 기단식, 계단식으로 변천하였다. 지안의 장군총, 태왕릉, 천추총 등은 고구려 돌무지무덤의 가장 발전된 단계를 보여주는 예이다. 흙무지무덤은 지하,반지하, 지상에 널길이 있는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만든 형식으로 돌방의 수, 천장의 짜임, 널길의 위치 등에서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 벽화 무덤은 고구려의 옛 도읍 일대에 집중되어 있으며, 생활풍속, 장식무늬, 사신도 등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고구려의 금동관
고구려사람들은 신분에 따라 다른 모양의 관을 착용하였다. 고구려의 관인은 절풍이나 소골이라 불리는 고깔모양의 관에 새 깃 2개를 꽂고 금테나 은테를 섞어 둘렀다. 지안 일대에서 출토된 고구려의 금동관 꾸미개는 두껍게 도금된 상태로 대개가 세움 장식 가장 자리를 촘촘히 오려낸 다음 하나씩 꼬아 새의 깃털처럼 표현하고 세잎무늬 등을 맞새김해 장식하였다. 개마총 벽화에 등장하는 인물이 쓰고 있는 관 꾸미개의 형태가 이와 비슷하다. 이런 고구려의 관과 꾸미개는 금.은제 귀걸이와 허리띠장식,금동신발 등과 함께 고대국가 지배계층의 신분과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이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맞새김무늬꾸미개, 고구려, 5~6세기, 평양 진파리무덤에서 출토된 금동으로 만든 꾸미개로 여기에 표현된 맞새김 무늬는 생동감이 넘치는 고구려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불꽃 맞새김무늬관, 고구려, 5~6세기, 평양시 대성구역에서 출토된 금동관이다.


산모양 관꾸미개, 고구려, 5~6세기. 산모양을 형상화한 금동관이다.


깃털모양 관꾸미개, 고구려, 5~6세기. 고구려 관모를 대표하는 깃털을 꽂은 조우관을 금동으로 표현한 유물이다.


봉황모양꾸미개, 고구려, 5~6세기, 평북 운산 용호동 무덤에서 출토된 금동으로 만든 꾸미개.


단순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디자인이다.


귀걸이, 고구려, 5~6세기, 서울 능동에서 출토된 금귀걸이.


못신. 출처는 알려져 있지만 고구려를 대표한 유물로 실제 사용한 것이 아니라 무덤의 부장품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금동신발은 바닥에 박힌 못의 개수가 많고, 바닥판만 금석으로 만든 점이 특징이다. 지안 삼실총과 통구 12호분의 벽화에 이러한 신발을 신고 있는 고구려 무사가 묘사되어 있다. 이 신발은 바닥판만이 남아 있는데, 사각추 형태의 금동못 40여개가 촘촘히 박혀 있다. 바닥판 가장자리에 작은 구멍이 짝을 이루어 뚫려 있는 점으로 보아, 신발의 위쪽은 가죽이나 천으로 만들어 연결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신발은 실제 사용된 것이라기 보다는 의례용이나 껴묻거리로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말탄 사람이 그려진 벽화편, 고구려, 5세기, 평남 남포 쌍영총에 출토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고구려 벽화 실물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벽화편이다. 말을 타고 있는 고구려 무사를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림의 표현 수법이 상당히 세밀하면서도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구려 복식 및 무기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는 그림이다.

1913년 평안남도 남포시의 쌍영총을 조사할 때에 수습된 벽화 조각으로 널길벽 인물 행렬도의 일부다. 말을 타고 달리는 사람의 모습에서 당시 고구려인의 옷치장과 말갖춤 등을 엿볼 수 있다. 이 인물은 '절풍'이라는 고구려 특유의 모자에 새 깃 두개를 꽂아 장식한 '조우관'을 쓰고 있다. 재갈과 고삐를 이용해 달리는 말을 부리며, 말 위에서 몸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안장과 발걸이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말띠드리개나 말띠꾸미개 등으로 말을 장식하고 허리에는 화살통을 차고 있다. 고구려무덤 벽화 사냥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이런 모습을 통해 활쏘기에 능했던 고구려인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글자가 새겨진 벽돌

지린 성 지안의 태왕릉과 천추총에서 출토된 벽돌이다. 이 무덤들은 대형 계단식 돌무지무덤으로, 무덤 위쪽에 기와를 이은 건물을 세웠거나, 무덤을 지키는 사람과 관련된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벽돌은 무덤이 오래도록 보존되기를 기원하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내용은  "원하옵건대 태왕릉이 산처럼 안전하고 뫼처럼 튼튼하소서", "천추만세토록 영원히 튼튼하소서", "하늘과 땅처럼 보존 되소서" 라 한다.


짐승얼굴무늬 수막새와 연꽃무늬 수막새, 5~6세기 고구려 건축물에 사용된 수막새로 신라와 백제의 수막새 문양과 관련이 있는 듯 하다.


반원막새, 고구려, 5~6세기, 평양지역

고구려의 성
고구려는 도성과 주요 교통로에 수백개의 성을 축조하였다. 고구려인은 절벽과 가파른 산등성이 등 험준한 지세를 이용해 산성을 쌓아 비교적 적은 힘으로 방어력을 최대로 증대시켰다. 산성과 대비되는 평지성은 주로 도성지역에 축조되었다. 군사적, 방어적 성격이 강한 산성에 비해 평지성은 거주 기능이 뛰어나 다양한 정치적, 행정적 기능을 수행하기에 유리하였다. 고구려의 도성은 평지성과 산성이 짝을 이루도록 설계되어 평시에는 평지성에 거주하다가 전쟁이나 위급 시에는 산성으로 옮겨 가 대항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평양성은 고구려의 마지막 도성인 장안성이다. 양원왕 8년(552)에 성의 축조가 시작되어 평원왕 28년 이곳으로 도성을 옮기게 된다. 이 성은 대동강과 보통강을 자연 해자로 삼아 평양시가지를 둘러싸고 있으며, 외성, 중성, 내성, 북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이 각기 언제 축성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글자가 새겨진 성돌이 내성과 외성에서 발견되어 공사시기, 공사책임자 등에 대한 여러가지 정보를 전해주고 있다. 이런 평양성 성돌은 현재 6점이 알려져 있는데, 이 가운데 3점은 실물로 남아 있으며, 나머지 3점은 조선시대 고문헌을 통해서만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이 성돌은 내성 남벽에 막혀 있던 것으로 현재 북한의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5행18자로 소영 가군이 공사구간 4리를 맡았다는 내용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글자가 새겨진 평양성 성돌

고구려는 압록강 유역에서 일어나 점차 주변 지역을 아우르면서 삼국 중 가장 먼저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313년 평양 지역의 낙랑군을 몰아내고, 북으로는 중국 랴오허 강에서 지린성 쏭화강에 이르고, 남으로는 한반도 중부까지 영역을 넓혀 동아시아의 강자가 되었다. 고구려는 고유문화를 유지하면서도 중국과 서역, 북방의 외래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역동적이고 실용적인 문화를 만들어냈다. 고구려 문화의 국제성과 선진성은 천문, 지리, 문화, 음악, 무용, 공예 등 여러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이런 고구려 문화의 특징은 만주의 환련, 지안 일대와 평양 등 고구려 옛 도읍지를 중심으로 남아 있는 성, 무덤, 궁구러터, 절터 그리고 여기에서 출토된 토기, 철기, 꾸미개 등의 유물에 잘 나타나 있다. 고구려문화는 백제, 신라, 가야와 바다 건너 왜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통일신라와 발해로 이어졌다. <출처:중앙박물관>

요녕성과 길림성 일대 고구려 유적
중국 요녕성 환인현과 길림성 집안시에 있는 고구려 도성과 무덤, 비석 등이 고구려의 대표적 문화유적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고구려의 첫번째 도읍인 환인의 오녀산성과 두번째 도성인 집안의 국내성, 환도산성 등이 이에 포함되었다. 또한, 왕릉이나 귀족의 무덤으로 여겨지는 집안 일대의 돌무지무덤과 돌방 벽화무덤 39기도 광개토대왕릉비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리는 장군총과 태왕릉을 비롯해 각저총, 무용총, 모두루총, 오회분, 장천 1호 무덤 등이 이 지역을 대표하는 무덤들이다. <출처:중앙박물관>

평양 일대의 고구려 유적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였던 평양 일대에는 여러 성격의 고구려 유적들이 분포하는데, 그 중 평양시와 남포시, 황해남도 안악 일대에 분포하는 고구려 무덤 63기가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동명왕릉과 진파리 무덤군 15기, 호남리 사신총과 주변 무덤 34기, 덕화리 무덤 3기, 강서 삼묘, 덕흥리 무덤, 약수리 무덤, 수산리 무덤, 용강대총, 쌍영총, 안악 무덤 3기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들 중에서도 벽화무덤은 정교하게 축조된 돌방 내부에 다양한 생활모습과 사상을 세련된 필치로 그려내어 고구려 문화의 정수를 보여 주는 대표적 유적이라 할 만하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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