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당은 조선시대 관찰사가 근무하던 건물로 대부분 감영에서는 같은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선화당이라는 이름은 임금의 덕을 선양하고 백성으로 교화하는 건물이라는 뜻이다. 현재 남아 있는 선화당 건물로는 공주박물관 입구에 있는 충청감영 선화당과 대구 감영공원의 경상감영 선화당이 남아 있다. 대부분 조선후기에 세워진 건물로 그 중 원주에 있는 강원감영 선화당이 제일 오래된 건물이라고 한다. 전국에는 많은 조선시대 관아 건물이 남아 있지만, 관찰사가 근무하던 감영 건물은 대부분 대도시에 위치하고 있는 까닭에 남아 있는 건물이 많지 않다. 감영의 객사로는 전주객사가 유일하게 남아 있다. 선화당은 일반적으로 지방수령이 근무하던 건물인 동헌과는 달리 온돌방을 두지 않은 넓은 마루에 칸막이 형태로 공간을 구분하는 중앙부처 관아 건물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강원감영 선화당은 17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앞면 7칸, 옆면 4칸의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이다. 건물은 화강석으로 다듬은 기단위에 건물을 올려놓고 있는데, 사방에 툇마루를 두지 않은 단순하면서도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건물 양쪽과 뒷면에는 툇간을 두고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 2칸은 관찰사가 개인적인 집무를 보던 칸막이가 있는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강원감영 선화당. 앞면 7칸 규모로 관청건물 중에서는 제일 큰 규모이며, 궁궐 전각같은 느낌을 주는 건물이다.
내삼문을 지나서 선화당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박석을 깔아 놓고 있다.
7칸으로 이루어진 이 건물은 1층의 기단위에 세워져 있는데, 궁궐건물과 격식을 맞추기위해서 그런지 약간 낮게 만들어 놓고 있다. 양쪽 2칸은 툇간이며, 가운데 왼쪽 3칸이 넓은 대청마루라고 한다.
선화당 현판.
건물 양쪽편에는 앞면 1칸규모의 넓은 툇간이 있다.
건물 좌.우와 뒷면에 둔 넓은 툇간은 문을 열면 정자같은 느낌을 주도록 만든 것으로 보인다.
관찰사가 근무하던 선화당 건물은 상당히 웅장한데 비해서 바로 옆에 있는 숙소인 내아는 규모가 별로 크지는 않다. 조선시대 관찰사는 대부분 단신부임을 하고, 상당기간을 관할 지역을 순회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선화당 앞 마당은 상당히 넓은데 이는 관찰사가 주관하는 행사가 많아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선화당 뒷편으로는 경복궁 경회루처럼 연못과 누각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오랜 고목만이 남아 있다.
선화당 뒷편
옆쪽에서 본 선화당. 옆면 4칸이지만 앞.뒷쪽은 칸이 좁고 가운데는 넓게 되어 있다.
강원감영 선화당
선화당은 조선시대 강원도 관찰사의 집무실이다. 선화당의 뜻은 임금의 덕을 선양하고 백성을 교화하는 건물이라는 의미이다. 관찰사는 이곳에서 행정.농정.조세.민원.군사훈련.재판 등에 대한 총괄업무를 수행했다. 조선전기 강원감영의 건물들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다. 이후 1634년(인조12) 이배원 목사가 객관을 건축하기 시작하였고, 1665년 이만영 관찰사가 객사 서쪽에 선화당을 창건하면서 본격적으로 건립되었다. 선화당은 3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1667년 이후산 관찰사가 4칸 규모로 완공시켰다. 건물외부의 구조를 보면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1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단층건물로 세워졌다. 지붕은 겹처마에 팔작지붕 구조로 만들어졌다. 내부 공간은 정면.후면과 양측면에 1칸의 툇간이 있고, 중앙좌측의 정면3칸, 측면 2칸 공간은 벽체가 없이 3면이 개방된 대청으로으로 조성되었다. 바닥은 우물마루로 만들어졌고,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웅앙의 우측으로는 정면 2칸 측면 2칸에 띠살창과 띠살문으로 구획된 방이 나란히 배치되었다. <출처:원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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