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으로 불타버리기전까지는 건봉사는 총 642칸의 건물 칸수를 자랑하던 전국 4대 사찰의 하나였다. 신라 법흥왕때 처음 창건한 사찰로 알려진 이 사찰은 조선 개국에 기여한 무학대사의 스승이 나옹화상이 크게 중수한 사찰이다. 세조가 건봉사를 원찰로 지정하고 전답을 하사하여 조선시대에는 양주 회암사와 함께 왕실과 관련이 깊었던 사찰로 임진왜란때에는 사명대사 의병을 이곳에서 기병하였고, 일본으로부터 돌려받은 부처님 진신치아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전통이 깊은 사찰이다. 설악산 신흥사, 백담사 등을 말사로 거느리고 있었다.
건봉사는 북쪽편에 대웅전 영역, 남쪽편에 극락전 영역, 뒷편에 낙서암과 사리탑을 두고 있는 가람배치로 한때는 3,183칸의 규모를 자랑하기도 했으나, 여러차례의 화재로 소실과 중건을 거듭하여 일제강점기에는 약 642칸의 전각을 두고 있었다. 궁궐이 999칸 규모였던 조선시대에 엄청난 규모를 유지했던 사찰이었다고 할 수 있다. 건봉사는 한국전쟁당시 치열한 격전의 현장으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고, 불이문과 홍예만이 남아서 옛 건봉사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1994년부터 중건되기 시작한 건봉사는 현재 대웅전 영역의 전각은 상당부분 중건되었으며, 사리탑의 적멸보궁, 낙서암 영역의 산신각 등 일부 전각이 복원되어 있다. 극락전 영역을 비롯한 상당부분은 옛 건물의 기단과 초석들이 남아 있어서 건봉사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아직 건물이 복원되지 않고, 옛 절터만 남아 있는 극락전 영역. 설악산 신흥사, 백담사 등은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을 중시했으며, 건봉사의 중심영역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곳이다.
건봉사의 중심불전인 극락전이 있었던 곳으로 보이는 절터.
건봉사 극락전 건물들에 있었던 자리에 놓여 있는 초석들
극락전과 대웅전 사이에 있는 길.
대웅전 영역은 상당부분 복원이 진행되었다. 대웅전 영역만으로도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오래된 절터와는 달리 계단의 석재들이 아주 깨끗한 상태로 남아 있다.
건물이 세워졌던 기단부의 축대 또한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극락전 뒷편 작은 불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건물터
작은 연못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곳.
극락전을 지나 낙서암이 있었던 곳으로 올라가는 길. 독성각과 산신각이 복원되어 있다.
낙서암 영역 입구의 계단
계단을 올라서면 작은 연못이 복원되어 있다.
발굴과 정비작업이 진행중이 옛 낙서암 절터
낙서암 절터 뒷편에 산신각이 복원되어 있다.
발굴작업이 진행중인 부분. 옛 전각의 축대와 기단부를 이루던 석재들을 볼 수 있다.
소실된지 얼마되지 않아서 현재의 자리에 옛 건물들을 복원하여도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다른 지역의 사찰들과는 달리 건봉사는 대부분 잘 가공된 화강암 석재를 사용하고 있다.
낙서암 절터의 축대를 이루는 잘 다듬어지 석재들
축대와 돌계단
한쪽편에 정리해 놓은 석재들
건봉사 안쪽에 사명대사가 일본으로부터 돌려받은 부처님 치아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복원되어 있다.
불이문을 지나 건봉사로 들어오는 길
건봉사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 전국 4대사찰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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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봉사
건봉사는 전국 4대사찰의 하나로 만해 한용운 선생의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지에 의하면, 신라 법흥왕 7년에 아도화상이 원각사를 창건하였고, 그 후 도선국사가 중수한 뒤 서봉사라 하였으며, 고려말엽 나옹화상이 중수하고 건봉사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라 경덕왕 17년(578년) 발징화상이 중건하고 정신, 양순 등과 염불 만일회를 열었는데, 이것이 염불만일회의 효시가 되었으며, 현존하는 '등공탑비'는 782년 염불만일회에 참가했던 31인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 극락왕생하였다고 전하고 그 부도를 모신것이다. 서기 1465년 세조임금이 건봉사를 원당으로 삼은 뒤, 어실각을 짓고, 전답과 친필 동참문을 하사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서기 1878년 4월3일 큰불로 인해 3,183칸이 전소되었으나, 여러 차례 복원작업을 통하여 1911년에 9개말사를 거느린 31본산의 하나가 되었다. 건봉사는 임진왜란 때에 사명대사가 기병한 호국도량이었으며, 당시 통도사에 있던 부처님 진신치아사리를 왜병이 일본으로 가져간 것을 사명대사가 사행하였다가 다시 찾아와 이곳에 봉안하였다. 이 지역은 한국전쟁중 휴전직전까지 2년여에 걸쳐 아군 5,8,9사단 및 미군 제 10군단과 공산군 5개 사단이 16차례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건봉산 전투 전적이며, 이때 건봉사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으나, 1994년부터 대웅전, 팔상전, 염불만일원, 종각, 사지 등이 각각 복원되었고, 지금도 사찰복원이 계속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전쟁전 건봉사는 총 642칸과 보림암 등 124카의 18개 부속암이 있었다. <출처:고성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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