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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 고고관] 문자의 사용, 서역과의 교류

younghwan 2011. 10. 17.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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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에 한자가 언제 전해졌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마립간시기인 4~5세기대에 고구려와의 교류를 통해 한자 사용이 확산되어진 것으로 보이며 많은 유물들이 동시대에 조성된 돌무지덧널무덤에서 글자가 적힌 청동그릇들이 출토되어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진흥왕대 이후에는 진흥왕순수비를 비롯하여 각종 비석에서 당시 사람들의 문자 생활을 엿 볼 수 있다.

문자를 사용하다
문자는 지식과 정보를 축적하고 전달합니다. 사회와 문화의 발전에 문자만큼 중요한 것도 없습니다. 신라인은 한자로 기록하였는데, 언제 한자가 전해졌는지 분명히 알 수는 없습니다. 4~6세기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 한자가 쓰여진 부장품들이 발견되고 있어, 한자를 활발히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세기가 되면 포항 냉수리비나 진흥왕순수비, 남산신성비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신라고유의 이두식표현이 점차 사라지고 문장이 한문체로 바뀝니다. 삼국통일 뒤에는 한자를 해독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사용범위가 넓어졌습니다. 당나라에 유학생이 파견되고 불교가 융성하게 되면서 문자 수준도 급속히 높아집니다. <출처:경주박물관>


청동으로 만든 합이 출토되었습니다. 이 그릇의 특징은 뚜껑과 그릇 바닥에 똑 같은 명문이 새겾 있다는 점입니다. '조'로 판독되는데 이 글자는 '弔'의 속자입니다. 죽은 이를 애도하기 위한 의미에서 글자를 새긴 것으로 여겨집니다. <출처:경주박물관>


'大富貴'명 말종방울, 5~6세기, 경주 황오동


'비'명 뼈항아리, 통일신라

 신라는 중국 등 주변국가 뿐 아니라 서역과도 많은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유물이나 유적의 형태로 그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신라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은 시베리아 알타이 지역의 무덤과 비슷한 구조이며 이 무덤들에서 출토되는 많은 유물들 또한 서역이나 중앙아시아와 관련이 많다고 한다. 금관과 허리띠, 각배는 북방유목민 문화와 관련이 많은 유물들이이다. 유리그릇, 상감구슬, 장식보검 등은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에서 수입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많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국보 193호로 지정된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리병이 있으며, 황남대총, 천마총, 금령총 등 신라 황금문화전성기인 마립간시기에 조성된 고분에서는 이런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유물들을 많이 출토되고 있다.


신라, 서아시아를 만나다
경주에서 출토된 서아시아의 문물은 신라가 머나먼 서쪽 나라들과도 접촉하고 교류했음을 알려줍니다. 대표적 유물은 유리그릇입니다. 신라의 왕릉급 무덤인 경주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약 25점에 이르는 유리그릇들이 출토되었습니다. 대부분 지중해 연안과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만들어져 실크로드를 따라 수입된 것들입니다. 경주 계림로 14호묘에서 발굴된 황금보검도 양 지역의 교류를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서아시아에서 만들어진 황금보검은 칼 집 표면을 금관으로 덮고 무수히 많은 금알갱이와 붉은 석류석으로 화려하게 장색했습니다. 경주에는 서아시의 문물 뿐 아니라 사람도 오갔습니다. 9세기 이슬람 문헌에는 이슬람인이 신라에 정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괘릉과 흥덕왕릉의 무인상은 이국적입니다. 신라에서 벼슬을 했던 서아시아인을 모델로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출처:경주박물관>



황금보검(보물 635호), 6세기초, 경주 계림로 14호묘. 이 보검은 동아시아에서는 볼 수 없는 검의 양식으로 신라와 서역과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보편적으로 신라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중국을 통하거나 서역에서 직접 수입한 보검으로 추정된다.

경주계림로보검(보물 635호)
경주 황남동에 있는 미추왕릉 지구에서 발견된 길이 36㎝의 칼이다. 1973년 계림로 공사 때 노출된 유물의 하나로, 철제 칼집과 칼은 썩어 없어져 버리고 금으로 된 장식만이 남아 있다. 시신의 허리 부분에서 발견되었는데, 자루의 끝부분이 골무형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 붉은 마노를 박았다. 칼집에 해당되는 부분 위쪽에 납작한 판에는 태극무늬 같은 둥근무늬를 넣었다.삼국시대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고리자루칼(환두대도)과 그 형태와 문양이 다른데, 이러한 형태의 단검은 유럽에서 중동지방에 걸쳐 발견될 뿐 동양에서는 발견되는 일이 없어, 동·서양 문화교류의 한 단면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문화재청>


상감유리목걸이 (보물 634호). 이 유리구슬은 서아시아나 지중에서 유행했던 제작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비슷한 방식으로 만든 신라의 상감유리구슬과는 차별되는 직수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목걸이를 이루고 있는 구슬들 중에 남색의 커다란 유리구슬을 자세히 살펴보면놀라운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름 1.8cm 정도로 작은 유리구슬의 표면에 하얀 얼굴에 매력적인 빨간 입술을 가진 사람 얼굴 5개와 오리, 초화를 상감기법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머리는 보관을 썼으며, 좌우의 눈썹이 곡선을 이룬 채 서로 붙어 있습니다. 이렇게 유리구슬에 사람 얼굴을 상감하는 방법은 지중해 연안 및 서아시아에서 유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출처:경주박물관>


상감유리구슬, 6세기, 천마총


삼감유리구슬, 금장식, 6세기 황오리 4호묘


신라의 상감유리구슬은 남색 구슬에 노란 유리구슬을 박아 넣은 것이 많습니다. 지중해와 이란 등지에서도 상감유리구슬이 보이는데 바탕색으로감색을 사용하는 경우는 찾기 어렵습니다. 남색구슬은 이미 신라에서 활발히 제작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남색구슬에 노란색을 감입한 상감유리구슬은 신라인이 창안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웃나라와 쉼없이 교류하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 가야뿐만 아니라 중국, 북방의 유목민족, 왜, 그리고 멀리 서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교류하였습니다. 5세기에는 고구려와 활발히 교류한 결과, 유명한 '호우'명 청동합을 비롯하여 네귀항아리, 금귀걸이 등이 고구려로부터 들어왔습니다. 왜로부터는 돌팔찌와 그릇들이 수입되기도 했습니다. 삼국통일 뒤에는 당나라와 활발히 교류하면서 외국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습니다. 예컨대 자장, 의상 등의 승려와 최치원 등의 학자들이 당나라로 유학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은 국제적인 대도시로서, 이곳을 방문한 신라인들은 다양한 문화와 접했을 것입니다. 한편, 나라시대의 일본과도 교류하였는데, 나라의 쇼쇼인에는 많은 신라산 문물이 그 증거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출처:중앙박물관>


옥피리


이들 옥피리들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인지 후대에 복원한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피리는 문무왕과 관련된 만파식적이 잘 알려져 있으며 경주 지방에서는 보물처럼 소중히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옥피리 보관함


일반적인 대금과 옥피리의 차이점 설명

옥피리에는 바람을 불어 넣는 취공과 떨리는 소리가 나는 청공이 있고, 손가락으로 구멍을 막아 음률을 만드는 지공이 있습니다. 1706년 경주부윤 이인징이 아홉구멍이 뚫려있고 둥글고 곧은 것은 대나무를 본 뜬 것이라고 쓴 것으로 보면, 아마도 이 검은색 옥피리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x선으로 촬영한 결과, 검은색 옥피리는 부러진 곳을 은으로 두 군데, 동으로 한 군데 감싼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이 두 점의 옥피리는 지금의 대금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두색 옥피리의 경우 칠성공의 수가 많고, 옥피리 두점 모두 취공은 타원형이 아니라 둥근 원을 그리고 있어서, 대금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출처:경주박물관>

만피식적과 옥피리
신라의 '만파식적'은 '온갖 풍파를 잠재우는 피리'입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신문왕이 감은사에 행차한 뒤 이견대에 들렀는데 이 때 해룡이 나타나 흑옥대를 바쳤다고 합니다. 이 해룡의 말에 따라 바닷가에 떠 있는 산위이 대나무를 잘라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에 소중히 보관하였습니다. 그 뒤 적군이 쳐들어오거나 병이 났을 때, 또는 큰 가문이 들거나 홍수 및 태풍이 불었을 때, 이 대나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낫는 등 모든 일이 평정되었으니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문인들은 이 옥피리를 신라의 보물, 즉 '만파식적'으로 여겼습니다. 조선 연산군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동해의 용이 신라왕에게 이 옥피리를 바친 것으로 적혀 있습니다. 또한 한문건은 '고려 태조가 이 옥피리를 갖고 싶어 했으나, 조령을 넘자 소리가 나지 않는다'하여 신라에 대한 충절을 나타내는 기물로 여겼습니다. 조선시대 경주 사람들은 옥피리를 '만파식적'과 같은 신물로 생각하였습니다. 옥적이 조령을 넘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은 신라지역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옥피리의 충절로 여긴 것입니다. 심지어 옥피리가 바로 만파식적이며 경주를 한발자국도 벗어난 적이 없다고까지 생각하였습니다. 이처럼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도 만파식적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옥피리가 고스란히 이어받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출처:경주박물관>

옛날 기록에 보이는 옥피리
조선전기 이석형(1414~1477)의 계림옥적이라는 시에 신라의 옥피리가 등장합니다. 1520년 편찬된 '신동국여지승람'에는 '옥피리의 길이가 한자 아홉치인데, 그 소리가 맑다. 속설에는 동해 용이 바친 것이라고 한다. 역대 임금들이 보물로 삼아 전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많은 문인들의 글속에 등장하였던 옥피리는 1582년의 화재로 훼손.유실된 것으로 보이고, 비슷한옥적이 이후에 다시 발견됩니다. 1707년 객사의 무너진 토담 속에서 김송학이라는 이가 옥피리를 주워 숨겨 놓았다가 발각되어 관아로 가지고 왔는데, 경주부윤 이인징(1642~1729)은 이 옥피리를 신라의 유물로 추측하였습니다. 의성김씨 운천 종택에도 옥피리가 전해 내려오는데, 그 보관함의 뚜껑에 1804년 김희주가 쓴 글이 있습니다. 그 글에는 자신의 옥피리가 신라 경순왕이 남긴 두 개의 옥피리 중 하나일 것이라고 하면서, 경주에 전해 내려오는 옥피리와 유사하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여기 전시된 연두색 옥피리와 관련하여 '부선생안'(1843)에는 서울에 사는 접위관 이인석이 동래에 왔다가 되돌아가는 길에 옥피리 한 개를 경주에 전하면서 '동도의 옛 유물이니 악부에 간직해 두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출처: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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