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57년경에 건국된 신라는 한반도 동남부세력을 장악하여 백제, 고구려와 함께 삼국시대를 이루는 중요한 세력이 되었다. 신라는 내물왕 때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왜(倭)를 격퇴하면서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중앙집권 국가로서의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지증앙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제도가 더욱 정비되면서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왕의 호칭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이후 법흥왕대에 불교를 받아들이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 통치질서를 확립하면서 중앙집권체제을 완비하고, 김해지역 금관가야을 정복하여 한반도 동남부지역에서 그 세력을 확고히 하였다.
신라에서 문자를 언제부터 사용하였는지는 크게 알려진 것은 없지만, 삼한시대 출토 유물에서 한자를 사용한 흔적이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한자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신라에서 문자를 사용한 흔적들은 마립간 시기에 조성된 무덤의 껴묻거리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것이 호우총에서 출토된 광개토대왕의 공적을 기리는 글이 새겨진 청동호우이다. 또한 이 시기 고분에서는 글자가 새겨진 관식, 초두 등 금속제품과 토기 등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6세기에 들어서는 영일 냉수리비, 진흥왕순수비, 남산신성비 등 긴 문장이 새겨진 비석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이후에는 당나라의 묘제의 영향을 받은 왕릉의 비석이나 승려들의 업적을 기리는 탑비 등에 많은 기록을 남겨 놓고 있어서 오늘날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나 모습을 연구할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신라의 금석문
신라에서 언제부터 문자를 사용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금석문을 통해 그 것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호우총에서 나온 청동호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청동호우에는 광개토대왕(재위 391~412)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글이 새겨져 있어, 늦어도 5세기 이전에는 신라에도 문자가 들어왔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5~6세기의 신라 무덤에서는 글이 새겨진 관식, 초두, 청동합, 동탁 등 금속제품과 토기 등에 한 두 글자 내외의 글을 새긴 것들이 발굴되었습니다. 그러다가 6세기 들어서서 신라에서는 영일 냉수리비, 진흥왕순수비, 남산신성비 등 많은 긴 문장을 돌에 새긴 비석을 남길만큼의 수준이 되었습니다. 신라가 삼국을 아우른 이후에는 문자생활이 보편화되면서 보다 많은 곳에서 다양한 것에 글을 새겼습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석문은 왕과 선사들의 행적을 새겨 능과 승탑 앞에 놓은 능비와 탑비입니다. 특히 당나라의 묘제가 유입되어 귀부나 이수를 두기도 하였습니다. 쇠붙이 글자를 새긴 금문은 불교의 성장과 더불어 더욱 더 다채롭게 나타납니다. 범종이나 사리갗춤과 같은 불교공예품에도 글을 새기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성덕대왕신종을 들 수 있습니다. <출처:경주박물관>
남산신성비 2비와 3비, 경주 남산 식혜골과 일성왕릉 주변 출토된 비석으로 591년 남산신성을 쌓으면서 세워진 비석으로 추정하고 있다. 남산신성비는 '삼국사기'기록에 의하면 진평왕 13년(591)에 축조되었다고 하며, 이 비석은 산성축조에 참여한 집단의 책임과 역할을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남산신성은 경주 남산 북쪽 산허리, 해목령을 중심으로 여러 골짜기를 둘러싸고 있는 산성입니다. 성벽은 돌로 쌓았고, 그 둘레는 3.7km에 이릅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평왕 13년(591)에 경주의 남쪽을 방어하기 위해 성을 쌓았으며, 문무왕 19년(679)에 다시 크게 쌓았다고 합니다. 남산신성비는 1934년 발견을 시작으로 2000년까지 총 10개의 비석이 발견되었습니다. 여기에 전시된 비석은 첫번째와 세번째와 일곱번째로 발견된 것들입니다. 비석에는 '신해년 2월 26일'이라고 날짜가 새겨져 있으며, 신해년은 591년으로 추정되므로 '삼국사기'의 기록이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한 집단의 평균 담당 거리가 13보 2자였다고 합니다. 성벽의 길이가 3.7km인 것을 감안하면, 대략 240여 집단이 참여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비석 역시 240여개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출처:경주박물관>
남산신성비 4비
남산신성비 5비와 7비
관문성 명문성비(복제품), 경주시 양남면 신대리 출토
영일 냉수리 신라비(복제품), 국보 264호, 포항시 신광면 냉수리출투, 591년
단양신라적성비(복제품), 국보 198호,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출토
글자가 새겨진 그릇 받침, 경주 월성해자 출토, 5~6세기
'井'이 새겨진 토기 뚜겅, 경주 용강동 고분군 출토, 6세기
쇠북, 경주 굴불사 터 출토, 1183년
문무왕 비, 경주 동부동 출토, 681~682년
문무왕 비는 681년 혹은 682년에 사천왕사에 세웠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뒤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라졌던 문무왕 비를 조선 정조 20년(1796) 경주부윤이던 홍양호가 재발견하고 경주 관아로 옮겼습니다. 이 때의 탑본이 '해동금석원'이라는 청나라 책에 실렸습니다. 이 비석은 또 다시 행방을 알 수 없다가, 1961년에 여기 전시된 비편이 먼저 발견되었고, 다른 한 편이 2009년에 발견되었습니다. 비문의 앞면에는 신라에 대한 찬미와 신라 김씨의 내력 등을 새겼으며, 뒷면에는 문무왕의 유언과 장례에 관한 내용을 새겼습니다. 비문은 '국학소경 김__이 썼으며, 구양순체의 해서는 단아하고 활달한 느낌을 주는데 대사 한눌유가 썼습니다.
태종무열왕릉비, 660년
흥덕왕릉 비, 836년
김인문 묘비, 695년
김인문은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친동생으로, 삼국 통일기 당과의 외교에서 큰 활약을 한 인물입니다. 그의 묘는 경주 서악동 태종무열왕릉 앞에 있으며, 묘 옆에는 이 비석을 꽂았던 귀부가 남아 있습니다. 이 비석은 1931년 서악서원 서쪽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비의 아래 부분인 이 비석은 한쪽 면에만 3.3cm 크기로 네모 칸을 치고 해서체로 약 400여자 새겼습니다. 그 내용은 대체로 태종무열왕이 김인문을 압독주 총관으로 제수한 사실, 백제를 항복시키고 고구려와의 전쟁에 참여한 사실 등이 새겨져 있습니다. 비문에는 비석을 세운 기록은 없지만 '삼국사기'에 695년 경주 서쪽에 매장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비석 역시 695년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출처:경주박물관>
임신서기석(보물 1411호), 612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비석은 신라 화랑을 미화하는 측면에서 상당히 강조되었던 비석으로 진흥왕순수비와 함께 신라를 대표하는 비석이라 할 수 있다.
임신년에 젊은이가 맹서를 기록한 돌, 임신년 6월 16일 두 사람이 함께 맹서하여 쓴다. 하늘 앞에 맹서하여, 지금으로부터 3년 이후에 충성스런 도를 행하고 과실이 없기를 맹서한다. 만약 이 일을 하지 못하면 하늘로부터 큰 죄를 얻을 것을 맹서한다.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지면 가히 행해야 할 것을 맹서한다. 또 먼저 신미년 7월 22일 크게 맹서하기를, 3년에 시, 상서, 예기, 춘추전을 차례로 습득하기로 맹서하였었다. <출처: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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