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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박물관] 강원도를 대표하는 불상과 불교문화재

younghwan 2012. 4. 5.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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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는 백두대간의 이름난 명산들이 많고 남한강과 북한강이 발원하여 흘러가는 고장으로 삼국시대 이래로 이름난 사찰들이 많은 편이다.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등의 명산에는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사찰들이 삼국시대 이래로 많이 세워졌고, 한반도 내륙지방의 주요 교통로인 한강수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원주 부근에는 고려시대 큰 사찰들이 들어섰다. 오대산 월정사, 상원사를 비롯하여 금강산의 고찰들은 조선시대에도 왕실과 관련되어 그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양양의 진전사와 선림원, 강릉의 굴산사와 한송사, 원주의 법천사, 흥법사 등 많은 사찰들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경제적, 사회적 요인 등으로 폐사되어 오늘날 그 절터만 남아 있다. 강원도를 대표하는 문화재 중 불상으로는 국보 124호인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을 비롯하여 국보 63호로 지정된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등 많은 유물들이 남아 있다. 특히 철원의 도피안사와 원주 지역에서는 고려시대 호족세력의 문화를 대표하는 철불상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특히, 춘천박물관에서 소장.전시 중인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은 유질이 섞힌 하얀대리석으로 제작되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63년 한일협정으로 반환되었는데 강릉지역을 대표하는 독특한 불상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강원도를 대표하는 불상
불상은 보통 돌이나 나무로 만들었는데, 신라말에서 고려초에는 철이 신재료로 등장하면서 철로 만든 불상이 크게 유행하였다. '철불'은 지방에서만 제작되었으며, 선종 사찰에서 주로 모셔졌다. 강원도의 철불은 원주, 철원, 동해, 홍천 등 각 지역에서 제작되었으며, 철원 도피안사 비로자나불(Vairocana), 동해 삼화사 노사나불 등은 불상의 몸에 제작 경위에 대한 자세한 글이 적혀져 있어 역사적으로 중요하다. 특히 원주지역에는 5구의 철불이 전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강원도에서는 지역색이 돋보이는 돌로 만든 불상들이 조성되었다. 높은 원통형의 보관을 쓰고, 볼과 턱에 살이 도톰한 얼굴을 한 한송사 석조보살좌상, 신복사 석조보살좌상,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등 강릉 주변의 한정된 지역에서 비슷하게 생긴 불상 예가 확인되고 있어 주목된다. 특히 그 중에서도 한송사지 보살상은 반짝반짝하는 유리질이 섞인 하얀 대리석으로 제작되어 특이하다. <출처:춘천박물관>


한송사 석조보살좌상(Bodhisattva), 국보 124호, 강릉시 한송사지. 보관을 쓰고 있는 이 보살상은 강릉 시립박물관에 소장.전시중인 몸통만 남은 석조보살상과 한짝을 이루는 것으로 보이며, 강릉 신복사지 석불좌상, 월정사 석조보살좌상과 비슷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강릉지역을 대표한 불상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따.

원래 강원도 강릉시 한송사 절터에 있던 보살상으로 1912년 일본으로 옮겨졌다가, 1965년 조인된 ‘한일협정’에 따라 되돌려 받았다. 잘려진 머리 부분을 붙일 때의 흔적과, 이마 부분의 백호(白毫)가 떨어져나가면서 입은 손상이 남아 있을 뿐 거의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머리에는 매우 높은 원통형의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관 위로 높이 솟아 있다. 볼이 통통한 네모난 얼굴에는 눈이 가느다랗게 새겨져 있고,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번져 있다. 목에는 굵은 3줄의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으며, 3줄의 목걸이가 가슴까지 내려와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에는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옷주름이 새겨져 있다. 검지 손가락을 편 오른손은 연꽃가지를 잡고 가슴까지 들어 올렸으며, 왼손 역시 검지 손가락을 편 채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발은 오른쪽 다리를 안으로 하고 왼쪽 다리를 밖으로 하고 있어서 같은 곳에서 발견된 한송사지 석불상(보물 제81호)과 반대이다. 한국 석불상의 재료가 거의 화강암인데 비하여 이 보살상은 흰 대리석으로 만든 점이 특이하다. 조각 수법과 아울러 재료에서 오는 질감이 좀 더 우아하고 온화한 기품을 느끼게 해준다. 약간 오른쪽으로 향한 듯한 얼굴과 몸은 풍요로우며, 조각수법 또한 원숙하고 정교하다. 원통형의 보관이나 풍만한 얼굴, 입가의 미소 등은 강릉 신복사지 석불좌상(보물 제84호)과 오대산 월정사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에서도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인데, 이들보다 한층 더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으며 만든 시기는 고려 초인 10세기로 추정된다. <출처:문화재청>


철조 석가여래좌상(Budda, 왼쪽), 철조 약사여래좌상(Bhaisajyaguru Budda,오른쪽),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철불상으로 원주지역에서 출토되었다. 원주를 비롯하여 인근 충주지역에는 철불상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투박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호족세력 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석조비로자나불상(Vairocana), 고려, 원주시
비로자나불은 '태양'이라는 뜻으로, 부처의 지혜가 크고 변하지 않음을 상징하는 화엄종의 본존불이다.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이 모셔진다. 비로자나불은 왼손의 검지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쥐는 수인을 취하고 있어 다른 불상과 쉽게 대별된다. 이 불상은 코가 깨지고 광배가 결실되었지만, 둥글넙적한 얼굴과 물결치듯 흘러내리는 옷주름, 매우 도톰하게 부조된 대좌의 공양상 부조, 상대석 연꽃잎의 모습 등에서 원주 고려 초기 불상의 특징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출처:춘천박물관>


보살(Avalokitesvara Bodhisattva), 고려 14세기, 강원도 회양군


광배(Halo), 통일신라말~고려초, 원주. 광배란 불(보살)상의 머리나 몸체에서 발하는 빛을 조형화한 것이다. 원래 석가모니불의 초인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점차 여러 보살이나 권속들에까지도 사용하게 되었다. 광배의 형태는 나라와 시대에 따라 다양하지만 크게 두광, 신광, 거신광으로 나눌 수 있다. 두광은 부처의 머리 전체에서 나오는 것으로 원광이라고도 하며, 신광은 부처의 몸에서 발하는 빛으로 반드시 두광과 함께 표현된다. 거신광은 입상이나 좌상에 관계없이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형태로서 전신광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광배의 형식에는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겹쳐서 표현한 이중원광과 광배의 끝 부분이 뾰족해서 마치 배 모양과 같은 것을 주형광배라고 부른다. 원주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이 광배는 비록 불상은 남아 있지 않지만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초에 제작된 매우 아름다운 광배이다. 화강암을 재질로 하여 윗부분이 뾰족하게 솟아오른 보주형의 거신광이다. 두광 안에는 꽃술 장식이 표현된 화려한 연판을 두르고 그 주위에 화문과 바깥쪽에 유려한 불꽃무늬가 섬세하게 조각되었다. 특히 신광의 중앙에 불상의 허리 뒤쪽과 연결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철심이 남아 있어 주목된다. <출처:춘천박물관>


나한상. 2003년 영월 창원리 창령사지에서 출토되었으며, 오백나한의 일부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94년 전남 나주시 불회사 인근에서 파불된 나한상이 발굴 조사된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두번째이며, 특히 나한상을 봉안했던 나한전 터가 함께 조사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나한이란, 아라한(Arhat의 음역)의 줄임말이다. 원래는 부처를 뜻하는 말이었는데, 후에 제자들 가운데 일체의 번뇌를 끊고 지혜를 얻어 세상의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는 성자를 의미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친근하게 웃고 있는 다양한 얼굴과 표정이다. 나한상들은 같은 얼굴과 자세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하나하나 다 개성있게 조각되었다. <출처:춘천박물관>

탑은 석가모니의 무덤
사찰에 가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 가운데 하나가 탑이다. 법당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서라면, 탑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세워진다. 사리는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후 화장을 통해 남은 결과물로 석가모니를 상징하는 가장 1차적인 상징물이있다. 그래서 탑 안에 사리를 모시기 위해 사리엄장구라는 특별히 제작된 그릇이 만들어졌다. 사리를 보관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다중용기로 사리를 겹겹히 담아 보관하는 방법이다. 두번째는 경전에 의거하여,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대신 다라니경을 작게 말아서 99개 소탑 밑의 구멍에 넣고 석탑에 봉안하는 방법이다.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 사리탑에 모셔졌던 사리기는 전자의 방법을 따르고 있다. 선림원지 석탑에 모셔진 소탑 형식의 사리기는 후자의 방법을 따른 대표적인 예이다. <출처:춘천박물관>


소탑모양 사리기(Pagoda-shape sarira), 통일신라, 양양군 서면 선림원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소탑모양의 사리기는 경북지역에서 많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인다.


염거화상 탑지(Memorial Copperplate, 통일신라, 원주시 지정면)와 보제존자 탑지. 염거화상탑지는 염거화상 탑에서 나온 글을 새긴 동판이다. 보제존자 탑지석에는 "도인 각수가 왕사 보제존자의 사리 1매를 탑에 모셨고, 비구니 묘관도 보제존자 사리 1매를 동쪽 탑에 모셨다. 대공덕주 봉익대부 서윤현의 법명은 각희이며, 처는 단산군부인 장씨이니 법명은 묘연이다."라늠 명문이 적혀 있다.


영전사지 출토 사리구(Sarira Reliquary), 고려 1388년, 원주시 영전사지. 은제접시(Dish), 은제도금 육각사리기(Sarira Reliquary), 은제 원통형 사리기(Sarira Reliquary), 수정구슬, 동전, 향목, 청동합(Covered case), 청자발, 석제 사리호, 청동 사리호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형적인 사리구의 형태를 하고 있다.


홍각선사 비편(The Fragment of a stele), 통일신라, 양양 선림원지. 통일신라 헌강왕 때의 고승인 홍각선사의 행적을 기록한 비신의 일부이다. 탑비의 귀부와 이수는 현재 양양 선림원지에 남아 있다. 비면이 심하게 마멸되고 여러 곳이 깨져 있어 판독에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남아 있는 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홍각선사는 17세에 출가하여, 880년(헌강왕5) 법랍 50세로 입적하였다. 출가전에 이미 경사에 능통했으며, 출가 후에는 불경을 깊이 연구하고 영산을 두루 찾아다니며 수행하였다. 수양이 깊어지자 많은 사람들이 도를 구하였고 왕도 그의 덕을 흠모하여 궁궐로 청해 설법을 듣기도 하였다. 이 비는 886년(헌강왕12)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김원이 짓고 승려 운철이 왕희지의 글씨를 모아 새겼다고 한다. 글자는 2cm 정도 크기의 행서체로 통일신라 말기에 왕희지의 글씨가 신라 전역에 보급되었음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이다. <출처:춘천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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