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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터

경주 원원사지(사적46호), 통일신라 밀교의 중심이 되었던 사찰터

younghwan 2012. 6. 8.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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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적 46호로 지정된 원원사지는 신라의 수도 경주의 남쪽 관문성 안쪽 경주 도심에서 20여km 정도 떨어진 봉서산 기슭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절터이다. 지금은 보물로 지정된 2개의 3층석탑과 부도만 남아 있고, 후대에 새로 지어진 사찰인 원원사가 절터 앞쪽에 자리잡고 있다. 절터에는 금당이 있었던 자리와 건물 기둥을 세웠던 주춧돌만 몇개 남아 있다. 사찰의 형태는 산중턱에 터를 조성하고 탑과 건물을 세운 형태로 선종 계열의 사찰인 설악산 자락에 자리잡은 양양 진전사지, 선림원지와 비슷한 분위기를 주고 있는 절터이다. 탑의 형태 또한 기단부에 8부중상이나 12지신상을 부조로 새겨 놓고 있는데, 이런 탑의 형태는 9세기경에 유행했다고 한다. 원원사지는 전통적인 쌍탑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부조상으로 장식하는 전환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이 절은 밀교를 이끈 안혜.낭유 등과 김유신.김술종 등이 국가의 평화를 기원하면서 세웠다고 하며, 경주 낭산의 사천왕사와 함께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전기까지 밀교의 중심이 되었다고 한다. 밀교는 비밀불교로 말하는 것으로 7세기 대승불교 화엄사상 등을 중심으로 인도의 영향을 받아 성립되었다고 한다. 보통 밀교는 미신적인 주술 체계로 타락된 불교로 인식되고 있느나, 정통적인 밀교는 개체와 전체의 신비적인 합일을 목표로 한다고 한다. 티베트.네팔 등의 불교는 성력적 성격의 후기 밀교의 특징을 많이 가지고 있으나 중국.한국.일본의 밀교는 그런 요소가 없다고 한다.



최근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원원사 뒤편으로 올라가면 통일신라 밀교의 중심지였던 원원사 옛절터를 볼 수 있다. 통일신라 말기 선종계열 사찰과 비슷한 입지조건과 가람배치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원원사 절터로 올라가는 계단


현재 남아 있는 절터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며, 통일신라 전성기 사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두개의 탑과 금당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절터에는 보물 1429호로 지정된 쌍탑이 원원사지삼층석탑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등이 남아 있다.


이 석탑의 가장 큰 특징으로 기단부에 신장상으로 12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석탑 중간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에 세워진 석등. 이 사찰이 상당히 오랜기간 명맥을 유지해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절터 뒷편에 남아 있는 금당터. 축대부분이 남아 있고, 금당 검물이 있던 자리에는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금당 자리에서 본 원원사 절터.


금당터에 남아 있는 건물 기둥을 올렸던 초석


금당터 주변에 남아 있는 석재들


원원사 절터


절터 앞에 최근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원원사


원원사 마당


원원사 입구


원원사 들어가는 길



경주 원원사지, 사적 46호,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
봉서산 기슭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이다. 원원사는 밀교의 후계자들인 안혜·낭융 등과 김유신·김의원·김술종 등이 뜻을 모아 국가의 평화를 기원하기 위하여 세웠다고 한다. 절터에는 금당이 있던 자리와 2기의 3층석탑과 석등 그리고 부도가 남아 있다. 탑은 동쪽과 서쪽에 있는데 규모와 형태가 거의 같으며 일제시대에 복원된 것이다. 탑에는 12지신상과 사천왕상을 새겨놓았는데, 그 수준이 매우 높아 통일신라시대 조각의 우수성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두 석탑 사이에는 석등이 있고 4기의 부도가 동쪽과 서쪽 계곡에 나누어져 있으며 모두 고려시대 이후 것으로 보인다. 원원사는 명랑법사가 세운 사천왕사·금광사와 함께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 전기까지 밀교의 중심이 되는 곳이었고 조선 후기까지 명맥이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탑의 조각수준으로 보아 당시 품격있는 절이었음을 알게 한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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