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story Traveling

지역박물관

[중국 섬서역사박물관 소장 당대 명품전] 화려한 생활용기, 당삼채를 비롯한 당대 도자기

younghwan 2012. 6. 22. 16:55
반응형


 중국 산시성 시안시에 해당하는 장안은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왕조들이 도읍으로 삼았던 도시로 중국을 통일 진나라, 이를 계승한 한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강성하고 국제적인 성격이 강했던 당나라가 수도를 삼았던 도시이다. 장안은 동.서교역로인 실크로드의 출발점이 도시를 지리적.역사적인 면에서도 국제적인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도시이다. 장안이 초기 중국의 많은 왕조들이 수도로 삼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고대 이래로 흉노를 비록한 서역과 북방 유목민들의 위협이 거셌기때문에 이를 제압할 수 있는 국경과 가까운 곳에 도시를 건설해야 했고, 이들 유목민들과의 투쟁을 통해서 강력해진 장안 주변의 세력들이 혼란기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당나라 이후 서역의 유목민 세력이 약해지고 동북방면의 거란, 금, 원, 청 등의 세력이 강성해짐에 따라서 원대이후에는 이들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북경이 중국의 수도로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장안은 그 면적이 로마의 6.2배, 비잔틴의 7배가 될 정도로 동시대에서는 그 규모가 매우 큰 국제적인 도시였다. 당나라는 장안을 궁궐을 줌심으로 여러개의 성으로 쌓고, 크고 작은 대로를 중심으로 기능에 따라서 여러 구획으로 나눈 계획적인 도시였는데, 이는 후대 동아시아 국가들이 도시를 건설하는 데 모범이 되는 사례였다. 장안의 도시계획을 모방한 대표적인 사례로는 발해의 상경용천부, 일본 헤이안시대의 교토 등을 들 수 있으며, 신라의 경주, 조선의 한양 또한 장안의 도시계획을 많이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역사에서 이민족과 중국민들 사이에 오랜 투쟁기간이었던 남북조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를 계승한 당나라대에는 이민족들과의 충돌도 있었지만, 교류 또한 상당히 활성화된 시기로 당시 장안은 세상의 모든 물품들이 거래되던 큰 규모의 시장이 발달하였다. 특히, 실크로드를 통한 서역의 물품들이 중국으로 많이 유입되었으며, 당나라 또한 이에 영향을 받은 많은 물품들을 만들었다. 그 중 남북조시대에 처음 만들어진 도자기는 당나라대에 많은 발전을 이루어 당삼채, 청자, 백자 등 다양한 도자기들을 만들었다. 남북조 시대 이후 장안에서 거래되던 많은 유리잔을 비롯하여 많은 물품들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의 유물로 남아 있다.

국제도시 장안
장안성은 궁성, 황성, 곽성으로 구성되었으며, 면적은 약 84만 ㎢로 로마의 6.2배, 비잔틴의 7배가 될 정도로 큰 도시였습니다. 궁성은 황제의 거처로 성 중심 북부에 위치하였습니다. 황성은 나중에 지어졌는데 궁의 남쪽에 있으며 중앙 관서구였습니다. 궁성과 황성의 동쪽, 서쪽, 남쪽의 삼면에는 성을 에워싸는 곽성을 쌓았습니다. 곽성안에는 남북대로 11개와 동서 대로 14개를 설치하여 모두 108개의 이방을 만들었습니다. 성안 동서 양쪽에 설치한 시장은 각각 이방 2개씩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동시와 서시로 불리었습니다. 이 두 시장에는 도시의 상점, 수공업 작업장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처럼 상업활동의 공간을 구획하여 시장을 개설하는 것은 중국 고대 계획도시의 특징입니다. 방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의 페쇄적인 구조는 상품 경제가 점차 발전함에 따라 상업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상품 경제가 매우 활발해지는 당나라 중기부터는 시장을 구획한 경계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출처:경주박물관>

화려한 생활용기
당나라 초기에는 경제가 번영함에 따라 생활 수준이 높아지고 대량의 수공업품이 시장에서 유통되었습니다. 당시 귀족들은 금,은,옥 등으로 만든 그릇에 음식을 담으면 장수할 수 있다고 믿어 귀금속과 옥으로 만든 그릇이 유행하였습니다. 금은제 그릇은 주로 황실과 상류층에서 사용되었으며, 황실의 하사품으로 쓰이기도 하였습니다. 1970년대 섬서성 서안시 하가촌에서 200여 점의 금은제 그릇들이 무더기로 출토되어, 무덤 벽화에서 보이던 다양한 금은제 그릇들의 실물이 확인되었습니다. 도자기를 굽는 기술도 크게 발달하여 도자기가 일상 생활에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백자는 하북성 임성현의 형요와 하남성 공현을 중심으로 제작되었습니다. 8세기 경의 유명한 시인 육우는 월주요의 청자를 옥에 비유하고, 형요의 백자를 눈에 비유하기도 하였습니다. 장안 근교의 법문사와 장숙존묘에서 9세기 중후반의 월주요 비색청자가 여러 점 발견되어, 당시 고도로 발달한 도자기의 제작 수준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출처:경주박물관>



꽃과 새무늬 은쟁반(Silver Tray with flower and bird design), 서안시 한삼채 출토. 출토 당시 절반만 남아 있었다. 판 안쪽에 봉황장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꼬리와 발만 보인다. 봉황의 발과 다리에 잔털과 깃털이 조각되어 있는 등 매우 세밀하게 만들어졌다. 남아 있는 부분만 보아도 본래 매우 정교하고 화려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경주박물관>


벼루(Inkstone), 섬서성 대여남향 염교촌 출토. 양끝이 넓은 이와 같은 형태의 벼루는 당나라때 풍자연 또는 기영연이라고도 불렀다. 바닥과 옆면이 과장되게 휘어져 있다. 휘어진 형태로 보아 당 중기에서 말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벼루(Inkstone), 서안시 출토, 7세기. 삼국시대 백제의 수도 부여나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도 여러점이 출토되는 벼루의 형태로 당시에 동아시아에서 크게 유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벼루의 중심면과 바깥쪽 사이에 홈이 나 있고 바닥의 낮은 굽 위에는 여러 개의 다리가 둘러져 있다. 이러한 형태의 벼루를 피옹연이라 한다. 이는 고대 대학이었던 피옹의 건축과 형태가 유사하여 붙인 이름으로 남조시대 이후까지 나타났으녀 광범위하게 유행하였다. 초기에는 뚜껑이 있고 발굽모양의 다리 세 개가 있었는데 이후 다리 개수가 점차 늘었고 납작한 모양에서 길고 두꺼운 모양으로 형태가 변하였다. 수대에는 구슬모양이 발굽모양을 대체했으나 당대에 다시 발굽모양으로 변화하였으며 일부는 다리가 20개 이상인 것도 있다. <출처:경주박물관>


교태무늬 베개(Pillow with Marbling design), 서안시 한삼채 출토,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에 청자로 만든 베개가 많이 만들어졌는데,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모서리가 둥근 장방형으로 한쪽을 약간 높게 하여 안정적으로 만들어졌다. 서로 다른 색깔의 흙을 엇갈려 배치시키는 교태기법은 성당시기 시작된 도자 공예 기술의 하나로 독특한 무늬효과를 내며 예술적 가치가 높다. 도자로 만든 베개는 수당 이후 흔히 쓰였던 여름용 침구이다. <출처:경주박물관>


삼채단지(Tricolor jar), 서안시 소토문촌 출토. 굽는 과정에서 다양한 색의 금속안료를 이용하였으며, 윤기가 나면서도 다양하게 변화하는 유약 층의 특징을 살렸다는. 점 또는 옅은 색으로 반복되는 모티브로 표현하여 비단이나 부채를 편 공작처럼 화려하다.

도자기
당대 도자기는 남방에서 생산되는 청자와 북방의 백자가 유명합니다. 백자는 초당시기에 처음으로 생산되었으며 7세기전반인 정관 연간과 8세기 전반인 개원 연간에 전국적으로 보급되었습니다. <국사보>에는 '천하의 빈부 귀천을 가지리 않고 모두 형요에서 생산된 백자를 사용한다'고 하였습니다. 형태는 소박하면서도 대범하여 문양을 넣지 않았습니다. 주로 항아리, 병, 사발, 접시, 베개, 완구 등을 만들었습니다. 바닥은 편평하고 테가 넓은 해무리굽입니다. 청자는 태토가 비교적 얇고 푸른색의 색깔에 윤기가 흐르는 것이 특징이며, 차 마시는 도구로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요지는 대부분 명주(형재의 영파) 부근에 모여 있고 이곳에서 대량으로 생산되었습니다. 해상과 육상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도자기는 각지로 대량 수출되었습니다. <출처:경주박물관>


네 귀달린 백자항아리(White porcelain jar with four ears), 서안시 출토, 8~9세기. 입구가 밖으로 벌어지고 목은 직선이며 어깨가 넉넉하다. 옆면은 둥글게 만들어졌다. 바닥은 편평하고 어깨에 네 귀가 붙어 있으며 몸체는 백유를 발라 매끄럽고 윤이 난다.


손잡이 달린 백자항아리(White porcelain jar with handle), 서안시 한삼채 출토, 8~9세기. 윗쪽의 아가리는 밖으로 벌어졌으며 목이 길고 주둥이가 짧다. 바닥은 평평하며 귀 모양의 손잡이가 달려 있다. 몸체에 유약을 발라 표면은 희고 매끈하다. 이러한 기형은 서역의 소수민족에서 유래한 것으로 중국과 서역간의 문화교류를 보여준다. <출처:경주박물관>


청자병(Celadon bottle), 서안시 장숙존묘 출토, 8~9세기. 아가리가 좁고 긴 목, 낮은 권족이 특징이다. 목 아래에 평행으로 세 개의 테두리가 있는데 계단모양이다. 청록색 유약을 발랐고 얇은 안쪽으로 자잘한 빙렬문이 보인다. 이와 같은 비색자는 당나라 월요청자 가운데 최고급품으로 여겨졌다. <출처:경주박물관>

동경
동경은 당나라 때 중국 역사상 가장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도자기가 동기를 대신하게 됨에 따라 청동원료와 기술이 모두 동경 생산에 집약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밖에도 동경은 선물용으로 사회적 교제에도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습니다. 당대 동경은 제조 기술이 정교하고 주조된 무늬가 생동감이 넘치며 화려합니다. 전통적인 둥근 거울 뿐만 아니라 해바라기 모양, 능화 모양, 네모꼴 등으로 다양하게 만들었습니다. 무늬로는 상서로운 동물, 포도, 난새, 화초가 있고, 신선 등 인물에 관한 고사도, 팔괘 등도 유행하였습니다. 나전, 금은평탈, 은첩도금 등과 같은 특수 기법도 동경제작에 이용되었습니다. <출처:경주박물관>


사신십이지무늬 동경(Bronze mirror), 출토지 미상, 7세기. 청동으로 만든 거울인 동경은 청동기시대 의기로 사용되었던 것이 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개인들이 소장하는 생활용품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삼국시대 고구려 고분벽화를 비롯하여 많은 곳에서 볼 수 있는 사신도와 12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동시대에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공유했던 정신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가운데에 꼭지가 달렸으며 두 줄의 볼록 선으로 처리된 동심원이 거울을 세 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중심부분에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이 꼭지를 중심으로 배치되었다. 두번째 둥근 부분에는 12간지 동물을 배열했다. 사신은 한대부터 벽사와 음양의 조화를 뜻하는 신령스러운 동물로 미술품에 자주 등장하였다. <출처:경주박물관>


네마리 새와 식물무늬 동경, 서안시 출토, 8세기. 전체적으로 해바라기 모양이며 안쪽에는 4마리의 새를 장식했다. 새 앞쪽에 꽃을 하나씩 두었고 바깥쪽의 8개 꽃잎에는 화초와 날벌레를 번갈아가며 하나씩 배치하였다.


해수포도무늬 동경, 출토지 미상, 8세기. 거울 뒷면 가운데 엎드린 모양의 짐승모양 고리가 있다. 각기 다른 모양의 서수 여섯마리가 포도덩쿨 사이에서 고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생동감이 넘친다. 그 바깥 부분의 볼록한 선은 화면을 분할하고 외곽에 배치된 새와 포도덩쿨은 시각적으로 중심부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출처:경주박물관>


서수십이지무늬 동경, 섬서성 경양현 출토, 8세기. 거울 뒷면에 볼록한 선을 둘러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고 있다. 안쪽은 상서로운 동물 네마리가 내달리는 모양으로 장식했고, 바깥쪽은 12칸으로 분할되어 칸마다 12간지에 속하는 동물이 하나씩 배치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거울은 수나라와 초당시기 유행하였는데 사악한 것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의미가 있다. <출처:경주박물관>


두마리 새와 식물무늬 동경. 거울 안쪽에 좌우로 날개를 펼친 난새 두마리가 입에 끈을 물고 있다. 발 밑에는 절지화가 놓여 있고, 위와 아래에는 연꽃가지를 두었다. 바깥쪽으로는 절지화 여덟송이가 배열되어 있다. 부리에 끈을 물고 있는 난새는 장수를 의미한다. <출처:경주박물관>


다양하고 세련된 옷차림
당나라의 옷차림은 이전과 비교하여 크게 달라졌습니다. 옷의 색채가 다양해지고 새로운 제작기법이 활용되어 여성의 아름다움을 더해 주었습니다. 복식은 크게 제사 지낼 때 입는 옷, 조정에 나아갈 때 입는 옷, 공적인 자리에서 입는 옷, 일상 생활에서 입는 옷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일상 생활에서 입는 옷을 제외한 복장은 예복에 속하는 것으로 한족의 전통 복식을 계승하였으며, 일상복은 북방지역과 서역 소수민족의 영향 하에 발전하였습니다. 옷의 색깔, 무늬, 장신구 등을 계급을 나타내었습니다. 황제와 관리들의 관복은 색깔로 등급을 구분하였고 무늬로써 관직의 차등을 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재료, 색깔, 가죽띠, 머리 등의 장식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남자 관복은 둥근 깃과 소매가 좁은 도포를 입었으며, 옷자락은 무릎 아래 넓은 테두리가 있는 직철입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일반 백성은 무릎까지 내려오는 웃옷과 바지를 입었으며, 선명한 색상이 있는 옷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무덤에서 출토되는 도용의 복식을 살펴보면 당시 사람들의 복식과 그 특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처:경주박물관>


채색여인상, 중국 1급문물, 서안시 왕가분 출토, 8세기.초당 시기 부녀자의 복식은 수나라 때 유행하던 날씬한 모습을 유지했으나, 성당시대부터는 넓고 긴 치마와 화려한 화장, 풍만한 체형이 새롭게 유행하였다. 당나라 고분 벽화에서도 이 상과 비슷한 우아하고 세련된 당시 여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출처:경주박물관>


남장한 채색 여인상, 서안시 고루촌 출토, 8세기. 머리는 양쪽으로 갈라 묶었다. 둥근 깃에 긴 옷을 입고 배 아래쪽으로 허리띠를 찼다. 유연한 자세로 자유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여자 도용이 남자의 차림새를 모방한 것은 당대에 유행한 남장 여인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국화무늬 은제꽂이(Siver chrysanthemum hairpins), 출토지 미상. 나비 날개 형태에 꽃무늬가 투각된 은제 머리꽃이이다. 꽃무늬는 활짝 핀 다섯 송이의 국화가 가지넝쿨과 연결되어 있는 모양이다. 같은 모양을 두 개를 만들었고, 좌우대칭으로 머리 양쪽에 꽂아 사용하였다. <출처:경주박물관>


꽃과 새무늬 은비녀, 서안시 출토. 꽃가지 무늬를 투각하였고 그 사이에 날아오르는 기러기 한 마리가 새겨져 있다. 이 비녀를 소두라고도 하며 꽃이와 같이 머리를 둥글게 말아 묶을 때 썼다. <출처:경주박물관>


납석제합(서안시 출토), 옥제빗(서안시 출토), 머리꽃이(서안시 의약공사 출토)

납석제합은 여성의 화장품을 담았던 통이다. 몸체와 뚜껑에 음각한 돗자리무늬를, 몸체 양쪽에는 구름무늬를 새겼다. 옥제빗, 한쪽면은 장수의 의미를 담은 나뭇가지를 입에 문 거북 한 쌍을, 다른 면은 나뭇가지와 꼿이 장식되어 있다. 당나라 부녀자들은 머리에 빗을 꽂아 치장하는 것을 즐겼다. 머리빗의 재질은 용도에 따라 다르며 그 중 장식용은 금,은,옥,상아 등 귀한 재료로 더욱 공들여 만들었다.  머리꽂이는 고대의 부녀자들이 머리를 고정시킬 때 썼던 장신구이다. 상나라 떄의 것이 발견된 바 있으며 위진남북조시기의 것도 다수 발견되었다. 초당시기까지 이러한 형태가 유행했으며 당나라 중기와 말기에는 꽃모양이 인기를 얻었다. <출처:경주박물관>


앵무새무늬 분합(출토지 미상, 중국1급문물), 다리미(서안시 곽가탄 출토)

앵무새무니 분합(Powder case with parrot design)은 몸통과 뚜껑이 만나는 부분은 윗쪽 뚜껑이 아래쪽 통을 감싸면서 맞물려 닫히는 자모구로 되어 있다. 뚜껑은 절지화와 날개짓을 하며 날아오르는 앵무새 한 쌍이 조각되어 있고, 가장자리에는 해당화 장식이 있다. 꽃무늬는 모두 도금처리하였다. 화장품을 담을 때 썼던 용기이다. 다리미는 테두리가 넓고 편평하며 배부분은 깊지 않으면서 바닥이 둥글다. 손잡이와 몸체를 납땜하여 연결했고 손잡이 머리 부분은 용머리 모양을 장식하였다. <출처:경주박물관>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