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곳으로 인도 산스크리트어 '스투파(Stupa)'에서 유래되었다. 스투파는 흙이나 돌로 쌓아 올린 무덤을 뜻하는 것으로 원래는 진흙을 구워서 만든 반원형돔형태였다. 인도 아소카왕이 기존에 봉안되었던 사리를 분배하여 8만 4천기의 탑을 세우면서, 무덤의 성격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불교가 여러 경로를 통해 전파되면서 여러 지역에서 탑이 세웠졌는데 탑의 형태른 각 지역의 자연환경이나 문화적 특성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에서는 벽돌로 쌓아 만든 전탑이, 한국에서는 돌을 다듬어서 만든 석탑이, 일본에서는 목탑이 많이 세워졌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에는 목탑이 많이 세워졌으며, 사찰은 탑을 중심으로 건물을 배치하는 여러 형태를 가람배치를 보였다.
삼국시대가 끝나갈 무렵 우리나라에서는 석탑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신라에서는 돌을 다듬어서 전탑처럼 쌓은 모전석탑이 만들어졌고, 백제에서는 화강석을 다듬어 목탑처럼 만든 석탑이 만들어졌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석탑은 백제와 신라의 석탑에서 볼 수 있는 특징과 목탑의 특징이 융합되어 오늘날까지 한국 석탑의 전형이 되는 석탑이 만들어졌다. 신라의 석탑에서는 기단석과 기둥 등에서는 목탑의 특징이, 여러층을 이루고 있는 지붕받침은 전탑에서 가져온 특징이라고 한다. 신라에서 석탑이 처음 만들어진 시기의 대표적인 석탑으로는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감은사지 석탑을 비롯하여, 고선사지 석탑 등이 있으며, 그 형식은 대체로 신라 석탑을 대표하는 석가탑이라 불리는 불국사 삼층석탑에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에는 석탑은 만드는 형식이 단순화되고, 그 형식도 정형화되면서 뛰어난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석탑은 그리 많이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몸돌에 불상이나 사천왕상, 팔부중상 등을 부조로 새겨넣는 석탑이 많이 만들어졌다. 신라의 석탑은 통일신라 후기와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불교에서 신앙의 대상이 탑에서 불상을 모신 금당으로 바뀌면서 그 제작수법도 발전하지 못하고, 정형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한국 석탑의 모범이 된 신라 석탑
신라는 목탑을 돌로 재현한 백제와 달리 중국의 전탑과 같은 모습의 분황사 모전석탑을 만들었습니다. '모전석탑'이라는 말은 안산암을 벽돌처럼 깎아 쌓았기 때문에 '벽돌을 본떠' 쌓은 석탑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2단으로 된 높은 기단, 삼층의 몸돌과 지붕돌로 이루어진 탑신부, 여러 단의 지붕받침, 꼭대기 장식으로 이루어진 형태의 신라 석탑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고구려와 백제를 아루는 신라는 삼국의 문화를 융합하고 세련되고 정제된 문화를 꽃피웠는데, 석탑에서도 만찬가지였습니다. 이 시기 석탑은 목탑과 전탑의 특징을 두루 갖추고 있습니다. 비록 과장되었지만 2단으로 된 기단과 지붕, 기둥 표현 등은 목탑에서 가져 온 것이고, 여러 층을 이루고 있는 지붕받침은 전탑에서 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석탑을 만들기 시작한 7세기 후반의 감은사터 삼층석탑은 기단부터 3층 지붕에 이르기까지 여러 장의 돌을 짜 맞추었습니다. 탑을 완성하는데 무려 82장의 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탑의 규모가 점차 작아져서 8세기 중엽의 불국사 석가탑에 이르러서는 22장의 돌로 만들었습니다. 9세기 석탑은 22장도 채 되지 않습니다. 탑의 전체적인 형태는 초기탑과 비슷할지라도 점점 만들기 쉬워진 것이지요. 탑의 규모가 작아졌다는 것은 그 만큼 탑을 많이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8세기에 비해 9세기에는 무려 다섯배나 많은 석탑이 만들어진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출처:경주박물관>
고선사지 삼층석탑, 국보 38호로 지정된 이 석탑은 고선사 절터에 있던 것을 덕동댐의 건설로 물에 잠기게 되자 1975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은 대표적인 통일신라 삼층석탑이다. 높이 10.9m로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비슷한 형식과 규모로 석가탑으로 이어지는 통일신라 전성기의 웅장한 석탑의 양식을 보여준다.
돌로 탑을 쌓은 이유는 무엇일까?
'석탑'은 '석조탑파'를 줄인 말입니다. 그럼 탑파는 무엇일까요? 탑파는 인도말인 '스투파 Stupa'를 한자로 옮긴 말인테, 부처와 유골을 묻은 무덤을 뜻합니다. 진흙을 구워 만든 돔 형태의 인도탑은 전래된 곳이 어디냐에 따라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였습니다. 중국에서는 진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한층 한층 쌓아 '전탑'을 만들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나무를 이용하여 '목탑'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우리나라는 '석탑의 나라'라고 불릴만큼 석탑이 많습니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불교가 전래된 뒤 처음 만들어진 탑은 목탑이었습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돌을 이용하여 독창적인 석탑을 만들게 됩니다. 석탑은 처음에는 목탑을 충실히 재현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만든 석탑으로 생각되는 미륵사터 석탑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나무대신 돌로 탑을 쌓았던 것일까요? 그 이유 중 하나는 목탑이 불에 잘 탔기 때문일 것입니다. 높이가 80여미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황룡사 구층목탑처럼 당시 목탑은 절에서뿐만 아니라 그 도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습니다. 피뢰침이 없던 때 목탑은 벼락을 맞을 확률이 높았습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황룡사 구층목탑은 몽고군에 의해 불타 없어지기까지 무려 다섯번이나 벼락을 맞고 여섯번 다시 고쳤다고 합니다. 그만큼 목탑은 오래 견디지 못했던 것이지요. <출처:경주박물관>
통일신라 전성기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석탑인 석가탑과 다보탑. 경주 불국사에 있는 것을 복제한 석탑이 신라문화의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 경주박물관 마당에 전시되어 있다.
경주지역 절터에서 출토된 석탑의 기단석. 기단석의 규모로 볼 때 통일신라 전성기에 고선사지 삼층석탑과 비슷한 규모의 석탑들이 많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석탑 탑신부의 몸돌.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석탑의 몸돌에 주로 사리갖춤을 보관하는데, 몸돌 중에서 사리갖춤이 있었던 구멍이 있는 몸돌들도 볼 수 있다.
석탑은 초기에는 규모가 크서 많은 수의 돌들을 쌓아서 만들었으나 후대에 들어서면서 적은 수의 돌들을 쌓아서 쉽게 만들었다고 한다. 몸돌의 경우에도 초기 석탑은 여러개의 돌로 1개의 몸돌을 만들고 있으나, 후대의 1개의 돌로 몸돌을 만들고 있다.
목탑의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탑신부의 지붕돌. 주로 1개의 돌을 깎아서 목조건축물의 지붕처럼 보이게 하고 있다.
다양한 형태의 지붕돌
승소골 삼층석탑, 경주 남산 승소골 출토, 9세기 후반. 통일신라 말기의 정형화된 삼층석탑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주로 경북지역과 강원도 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사천왕상이나 팔부중상이 새겨진 형태의 삼층석탑이다. 이 석탑에는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경주 남산 동쪽 기슭의 승소골에 있던 탑입니다. 이 탑은 규모가 작아지고, 지붕받침이 4단으로 줄어드는 등 9세기 탑의 특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위층 기단과 1층 몸돌에 다른 탑에서는 볼 수 없는 조각이 있습니다. 위층 기단에는 상다리무늬 조각이 있습니다. 글고 1층몸돌에는 상다리무늬 안에 사천왕을 새겼습니다. 사천왕은 원래 인도의 토속신인데, 불교 성립 이후 부처님과 부처님의 말씀을 동서남북에서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습니다. 이 탑에 새겨진 사천왕은 부처님을 상징하는 사리가 모셔진 탑을 지키려던 신라인들의 염원이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처:경주박물관>
사천왕상을 새져놓은 탑신부. 석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또 하나의 세상으로 수미산을 지키던 사천왕상을 새겨 놓는 경우가 많다.
불상을 부조상으로 새겨 놓고 있는 몸돌
승려를 새긴 것처럼 보이는 몸돌
석탑은 통일신라 후기에 들어서면서 신앙의 중심도 석탑에서 불상이 모셔진 금당으로 옮겨짐에 따라서 세련됨이 웅장함은 사라지고 정형화된 모습으로 바뀐다. 통일신라 후기부터 고려시대에는 조형미가 뛰어난 석탑이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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