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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재(탑_석등_범종)

[경주박물관] 영원한 생명력을 가진 석조불상

younghwan 2012. 7. 11.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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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상은 부처의 형상을 표현한 것으로 좁은 의미로는 석가모니를 비롯한 여래의 모습을 표현한 것을 말하지만, 대체로 보살상.신장상 등을 포함하여 일반적으로 불상이라 일컫는다. 원래 불교에서는 신앙의 대상이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신 탑이나 보리시, 금강보좌 등이 중심이었으나 이집트와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지방과 인도의 마투라에서 처음 만들어져 대승불교의 전파경로를 통해 한국에 전해졌다. 사찰의 가람배치에 있어서도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초기까지는 부처의 사리를 모신 탑을 중심으로 가람이 배치되었으나 후대에 들어서면서 탑보다는 불상을 보신 금당이 사찰의 중심이 되었다.

 불상은 만든 재료에 따라서 석조불상, 목조불상, 철조불상, 금동불상 등이 있다. 불상이 처음 만들어진 인도나 서역에서는 진흙으로 빚어서 만든 소조불상이 많이 만들어졌으며, 우리나라에서는 화강석을 깎아서 만든 석조불상이 많이 만들어졌다. 많은 석조불상 가운데에서도 석굴암 본존불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불상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일본의 경우는 석조불상보다는 나무를 깎아서 만든 목조불상이 많이 만들어졌다. 신라 천년의 수도였던 경주에는 많은 석조불상들이 남아 있는데,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석조불상들은 그조각수법이나 예술적인 조형미 등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 이후에는 석조불상이 많이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그 조각수법 또한 통일신라시대의 것에 비해 많이 뒤떨어지는 편이다.

영원한 생명력을 가진 석불
불상은 크게 두가지 방법으로 만드는데, 하는 소조불처럼 재료를 덧붙여가면서 만드는 방법입니다. 다른 하나는 재료를 깎아 만드는 방법으로 목불과 석불이 그 예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돌로 만든 탑도 많지만, 돌로 만든 불상도 많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인도와 중국에도 돌로 만든 불상이 많습니다. 왜 불상을 돌로 만들었을까요? 흙이나 나무로 만든 불상은 내구성이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금동불은 일정한 크기 이상으로는 만들지 못하고, 비용도 상당히 들기 때문에 왕실과 귀족이 아니고서야 엄두도 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옛 사람들은 오래 남을 수 있는 큰 불상을 경제적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러한 불상의 재료로 적합한 것이 바로 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석불은 인도난 중국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인도, 중국 사람과 다른 미감을 가졌기 때문이지요. 또 다른 이유는 돌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인도나 중국에서 석불의 재료는 무른 대리석이나 사암인 반면에, 우리나라 석불의 재료는 단단한 화강암입니다. 화강암을 조각할 때에는 대리석이나 사암을 조각하는 것과 달리 조각칼을 사용할 수 없고 정과 망치만 사용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조각하기가 무척 어려웠고, 표현된 모습이 다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출처:경주박물관>


석조불 입상, 경주 장항리 절터 출토, 통일신라 8세기

경주 양북면 장항리의 한 절터에 흩어져 있던 것을 복원한 것입니다. 장항리 절터에는 오층석탑 2기와 불상대좌가 남아 있습니다. 이 불상은 하반신은 없는데도 서 있는 불상이라고 부르는 근거는 불상대좌에 불상을 세우기 위한 촉 구멍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크기는 대략 4.8m로 옛날 척도로는 1장6척에 달하는 매우 큰 불상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공들여 불상을 크게 만든 이유는 불교 경전에 석가모니부처의 키가 1장 6척이라고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언제쯤 만들었을까요? 불상이 언제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대개의 불상은 언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이런 불상은 연대를 알 수 있는 불상과 얼마나 같고 다른가에 따라서 대체로 시기를 결정합니다. 어느 한 시기, 특정 지역에서는 비슷비슷한 불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지요. 이 불상과 비교할 수 있는 불상은 바로 8세기 중엽에 만든 석굴암 본존불입니다. 근엄한 얼굴, 건강한 신체, 사실적인 옷 주름 등 어디지 모르게 석굴암 본존불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출처:경주박물관>


석조불두, 경주 남산 철와골 출토, 통일신라 8세기말 ~9세기초

이 부처 머리는 한 차례 큰 태풍이 지나간 후 경주 남산 철와골에서 발견되었으며, 1959년에 국립경주 박물관으로 옮겨졌습니다. 머리 크기가 1.53m에 이르고 그 무게는 1.7톤이나나갑니다. 만약 이 부처가 온전했다면, 얼마나 컸을까요? 그 높이를 추정하는데 경주 남산 열암골에서 발견된 마애불이 좋은 비교자료입니다. 이 열암골 불상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4.6m인데 이 중 머리 크기다 1/4를 차지합니다. 다시 말하면 4등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시대 다른 불상과 달리 머리를 크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조각가는 예배자의 시선을 생가했을 것입니다. 엎드려서 예배드린다고 할 때, 여느 불상의 비례로 머리를 만들었다고 한다면, 3층 건불보다 더 높은 곳에 있던 얼굴은 잘 보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얼굴도 볼 수 없는 부처에게 예배드린다면 불심이 우러날까요? 철와골 부처를 만들 때도 의도적으로 왜곡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6m 정도의 높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부처 머리가 나온 철와골에서는 그 정도 크기의 몸체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철와골 부처의 몸체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출처:경주박물관>


석조 관음보살 입상, 경주 낭산 출토, 통일신라 8~9세기

원래 보살상의 머리와 몸체는 각각 따로 있었는데, 머리는 일찍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고, 몸체는 경주 낭산 서쪽 기슭 능지탑 근처에 반쯤 묻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75년에 몸체를 조사하였는데, 그 마을에 살던 노인에게서 '이 불상과 달리 길쭉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국립경주박물관 정원에 전시 중이던 보살 머리가 낭산에 있는 보살 몸체와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1997년 4월에는 몸체가 묻혀 있던 부근에서 연꽃대좌를 발견하게 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불상이 관음보살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우선 관음보살은 관세음보살이라고도 한느데, 자비를 상징합니다. 이 보살은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상황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 모습은 대개 보관에 작은 불상인 화불이 새겨져 있고, 정병을 들고 있습니다. 이 불상 같은 경우, 보관 화불은 마보가 심하여 잘 알아볼 수 없지만, 왼손에 정병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경주박물관>

석불의 머리는 왜 없어졌을까?
1965년 경주 분황사를 발굴 조사할 떄, 절안에 있는 우물 속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석불들이 나왔습니다. 한결같이 머리가 잘려진 것들이었습니다. 이 불상들이 바로 그긋들입니다. 그렇다면 불상의 머리는 왜 없어진 것일까요? 그 원인으로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를 들 수 있습니다. 지진이 나면 받침대 위에 있던 불성이 굴러 떨어지는데, 가장 약한 부분인 목이 부러지기 쉽습니다. 또 몽고군의 침입, 왜란, 호란과 같은 전란에 의해 피해를 입기도 합니다.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는 일부러 불상을 훼손한 적도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간혹 땀을 흘리는 불상에 관한 기록이 보입니다. 이러한 일이 나면 유생들은 세상을 현혹시키는 것으로 간주하여 불상을 파괴하였습니다. 목불은 태워버렸고, 석불이나 금동불은 우물, 저수지, 바다에 던져 버렸다고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머리를 잘라 관청에 신고하기도 했습니다. 분황사 우물 속에서는 머리가 없는 불상의 몸체에 비해 적은 수의 머리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머리 없는 불상들은 머리가 잘리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깊은 우물 속에 버려지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출처:경주박물관>


분황사 우물에서 발견된 머리가 잘린 불상. 조선시대 유생들이 파괴한 불상들로 추정되고 있는 석조불상들이다.


분황사 우물속에서 발견된 불상들

부처의 옷, 불의
불의는 불상에 표현된 옷을 일컫는데, 원래 인도 출가자의 옷갖춤에서 나온 것입니다. 출가자의 옷은 속옷과 겉옷으로 나눌 수 있고, 위에 입는 옷과 아래 입는 옷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위에 입는 속옷은 승각기, 또는 엄액의라고 부른데, 왼쪽 어깨를 덮어 사선으로 내려 허리에 끈으로 묶습니다. 아래 입는 속옷은 군의라고 하는데, 장방형천을 하반신에 두르는 것으로 인도 남자의 하의인 도티와 유사한 모습입니다. 겉옷은 3가지가 있어 보통 삼의라고 하는데, 흔히 대의라고 하는 강가리, 상의 혹은 상착의라고 하는 울다라승, 하의라고도 하는 안다회가 있습니다. 승가리는 가장 겉에 입는 옷으로 외출할 때 착용하던 겉옷이었고, 울다리승은 행사용 의복이며, 안다회는 승원 내에서 머물거나 일하는 시간에 입었다고 합니다. 불의를 입는 방식은 크게 통견과 편단우견 두가지가 있습니다. 통견은 불의가 양 어깨를 덮어서 온 몸을 감싼 형태로, 설법하거나 법도에 맞는 몸가짐을 취할 때 착용하였습니다. 편단우견은 불보살과 연장자에 대해 공경과 예를 표할 때의 옷갖춤입니다. 장방형의 천으로 몸을 감싸되 오른쪽 어깨가 드러나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러한 옷갖춤은 불상에서도 표현되었습니다. 통견의 불의를 입은 불상이 불상 조성 초기 간다라지역에서 주로 조성되었다면, 편단우견식 불의를 입은 불상은 마투라지역에서에서 주로 조성되었습니다. 통견과 편단우견은 기본이고, 중국과 한국에서는 상의와 대의를 모두 입는 방식의 착의법이 나타나는데, 상의를 입은 위에 대의를 편단우견으로 착용한 형태로 오른쪽 가슴과 팔에 상의의 일부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석가모니가 살아계셨을 때 입으셨던 옷은 무슨 색깔이었을까요? 불의는 가사라고달리 부르기도 하는데, 가사는 산스크리트어 카사야의 음역으로 '탁한색'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경전에 '출가자는 탁한 색으로 옷을 지어야 한다'고 한 것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석가모니도 탁한 색의 옷을 입지 않았을까요? <출처:경주박물관>

통견 불의를 불상

편단우견식 불의를 하고 있는 불상

부처의 손갖춤은 수인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뿐만 아니라 보살이 깨달은 진리나 서원을 밖으로 표시하기 위하여 열손가락으로 짓는 손모양이다. 선정인인 참선할때 짓는 손갖춤으로 모든 부처가 취할 수 있다. 시무외인.여인원은 어떠한 두려움도 없애주고 어떤 소원도 다 들어준다는 뜻으로 모든 부처가 취할 수있다. 전법륜인은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린다는 뜻으로, 석가모니가 불교의 진리를 전도할 때의 손갖춤이다. 항마촉지인은 석가모니불이 온갖 번뇌를 물리치고 성도하는 순간에 짓던 손갖춤이다. 지권인은 비로자나불이 짓는 손갖춤으로 이와 지혜, 중생과 부처, 미혹함과 깨달음은 본래 하나라는 뜻이다. 아미타 구품인은 아미타불이 맺는 아홉 가지 모습의 손갖춤으로, 신앙심이나 성품의 깊이에 따라 중생을 9등급으로 나누어 교화하여 구제한다는 뜻이다. <출처:경주박물관>


선정인 손갖춤을 하고 있는 불상


전법륜인 손갖춤. 석가모니불이 취할 수 있는 자세이다.



지권인 손갖춤을 하고 있는 불상. 비로자불이 취할 수 있는 자세이다.



항마촉지인 손갖춤을 하고 있는 불살. 석가모니불이 취하는 자세이다.

경주박물관 야외에 전시된 석조불상들


석탑 몸돌에 부조로 새겨진 불상


부조로 새겨진 불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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