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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실에서 출산과 교육은 왕조를 유지하기 위한 근간으로 왕실 자손을 얻고 교육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왕실에서는 태교를 통하여 안전한 출산과 건강한 아기의 탄생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를 위해 산실청을 설치하는 등 필요한 많은 조치들을 취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태어난 아기의 태를 갈무리하는 것이데, 이는 아기의 장수와 복을 비는 것으로 중요한 국가적 행사로 삼았다고 하며, 태실도감을 설치하여 태를 봉안하고 태실을 설치하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태는 깨끗히 씻은 후 항아리에 보관하여 전국 각지의 풍수가 좋은 곳에 묻었다.
창경궁 후원 언덕에는 특이하게 성종의 태실과 태실비가 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전국에 흩어져 있던 대부분의 조선왕실 태실을 모아서 고양 서삼릉으로 옮기는 과정에 그 형태가 잘 남아 있는 성종의 태실을 연구 목적으로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성종태실은 정형화되어가는 형태의 태실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태항아리를 묻든 석종형 부도처럼 생긴 태실과 그 주위를 둘러싼 난간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태실의 이력을 적은 태실비로 이루어져 있다. 태를 보관하던 태항아리는 이 곳에 묻혀 있지는 않고, 고궁박물관에 보관.전시되고 있다.
성종태실 및 태실비
태실은 왕족의 태반을 묻어 기념했던 조형물이며 태실비는 그 사연을 기록한 비석이다. 태실은 전국의 풍수가 좋은 명당에 흩어져 있었고, 성종의 태실은 경기도 광주에 있었다. 일제는 1928년 즈음에 조선 왕실의 태실 대부분을 서삼릉으로 모으는 과정에서 가장 형태가 온전한 성종태실만 이곳으로 옮겨 연구용으로 삼았다고 한다. <출처:문화재청>
창경궁 후원 언덕으로 옮겨져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는 성종 태실. 원래는 경기도 광주시 경안동에 있었던 것을 이곳을 옮겼다고 한다.
태 항아리를 묻은 태실은 승려의 사리를 보관하던 석종형 승탑과 약간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몸돌과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지붕모양을 하고 있는 태실의 머릿돌. 태실은 승탑 등과 달리 조각수법이 그리 뛰어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크게 격식을 차리지 않는 소박한 모습이다.
성종임금 태내항아리와 태지석 (1458년). 길다란 몸체에 어깨 위에 4개의 고리를 가지고 있으며, 조선전기 태항아리의 전형이 확립되기 직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고궁박물관 소장)
태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난간석. 조선시대 궁궐 돌다리 등에서 볼 수 있는 난간석과 비슷하게 만들었다.
태실의 내력을 적은 태실비. 거북받침돌에 비몸을 세운 전형적인 비석의 형태를 하고 있다.
태실비에 적혀 있는 글씨
성종 태실이 있는 창경궁 후원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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