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 동구 화수동에 있던 화도진은 구한말 병인양요를 거치고, 일본과의 조약으로 제물포가 개항된 이후 인천을 통해 드나드는 선박을 감시하고 해안방어를 위해 설치한 포대들을 관리하기 위한 관청이다. 진(鎭)은 주로 해안이나 내륙수운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군사조직으로 진영(鎭營)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화도진은 인천항과 주변 연안항로를 운행하는 선박을 감시하고, 외국 군함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세운 군사조직으로 기존에 있던 진(鎭)과는 달리 규모가 큰 편이다. 이 곳에서는 1882년 고종의 전권대사였던 신헌과 미국의 전권대사 슈벨트 제독 사이에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장소이기도 하다. 화도진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군제가 개편될 때 폐지되었다.
화도진 공원의 관아 건물은 기존 자료를 바탕으로 1988년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복원된 건물이다. 조선시대 관아 건물 중 하위 군사조직인 진(鎭), 보(堡)의 건물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실제로 화도진에 복원된 관아 건물보다는 작았을 것으로 보인다. 동헌, 내아, 행각으로 구성된 화도진 관아는 지방관아 건물 중에는 그 규모가 큰 편으로 일반 행정 조직인 군.현의 관아건물에 있는 객사는 두고 있지 않다. 화도진 관아 건물은 고종 15년에 국가적 차원에서 건설된 것으로 어영대장이 축조공사를 맡았다고 한다. 당시 인천항을 통해서 오가는 외국인들을 관리하고 군사시설을 관리하기 위한 관아로서 중앙 부처 관아에 준하는 규모로 크게 지은 것으로 보인다. 원래의 건물들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화도진이 폐지된 이후 화재로 불타버렸다고 한다.
화도진, 인천시 동구 화수동
화도진은 고종 15년(1878) 8월 당시 어영대장 신정희로 하여금 축조공사를 맡기고 그 이듬해 고종 16년(1879) 7월에 완공되었다. 고종황제는 이곳을 화도진이라 명명하고 서해안 방어를 맡게 하였다. 고종 19년(1882) 5월 22일 이곳 화도진에서 고종의 전권대신 신헌과 미국의 전권대사 슈벨트 제독사이에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후 고종 21년(1884) 5월에는 친위전영으로 되고 그 이듬해 고종 22년(1885) 6월에는 좌영으로 이속되다가 갑오개혁(1894)으로 군제가 개편됨에 따라 화도진은 불타 없어지고, 그 후 주택이 밀집되어 있던 중 1982년 5월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비를 세우고 서울 올림픽과 태평양시대가 열리던 1988년 9월에 화도진도를 기본으로 인천광역시에서 복원케 된 것이다. <출처:인천시청>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비. 인천 화도진공원은 1882년 조선과 미국간 체결된 한미수호통약조약을 기념하기 위하여 1982년에 조성한 공원으로 수교기념비와 조약이 체결된 장소인 옛 화도진 관아를 복원해 놓고 있다. 한미수호통상조약은 1882년 5월 22일 대조선국 전권대관 경리통리기무아문사 신헌과 대미국 전권대신 수사총명 로버트 윌슨 슈펠트 사이에 조인되었으며, 1889년 5월 19일 서울에서 비준서가 교환되었다. 이 조약은 한국이 서구 제국과 맺은 최초의 조약이었다.
화도진 공원에 전시된 구한말에 사용되었던 화포
화도진 관아 출입문. 행각과 솟을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문으로 이루어진 화도진 출입문
화도진 출입문이 'ㄱ'자형으로 된 행각. 수군 기지였던 화도진 행각은 병사들이 기거하과 관리들이 근무하는 병영 건물의 하나로 사용되었다.
행각 건물들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단촐한 건물로 툇마루가 있는 방들로 구성되어 있다.
행각 방에는 병사들이 근무하는 모습과 가구들을 재현해 놓고 있다.
동헌 출입문. 맞배지붕에 3칸으로 이루어진 출입문 행각은 물품들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화도진 관아 동헌. 동헌이란 통상 수령 등이 정무를 집행했던 곳으로 현감 수사, 병사, 감사가 주재하는 관아의 본 건물이다. 이곳 화도진의 동헌은 병인양요 후 연안각지에서 새로 들어선 31문의 포대를 관할키 위한 곳으로 행정 업무를 위한 장소였다. 건물은 앞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큰 건물로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양쪽에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이 곳 동헌은 화도진 수장이 근무하는 공간으로 지어졌지만, 실제로는 구한말 개항된 제물포항을 오가는 외국사절들을 맞고, 관련된 업무를 하기 위해 중앙에서 파견되는 관리들을 위한 공간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해안방어를 위한 군사업무를 위한 건물로는 큰 편이라 할 수 있다.
동헌 현판. 지방 관아 건물로 단청을 입히지 않았으며, 익공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다. 건물 기중은 다른 동헌 건물에 비해 굵지 않은 편이다.
이 곳 동헌에서 1882년 한.미통상수호조약이 체결되었는데, 당시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1882년(고종19년) 5월 22일 화도진에서 우리나라 전권대신 신헌과 미국 슈펠트 제독 사이에 한.미수호 통상조약을 조인하는 장면으로 이는 우리나라가 서구와 맺은 최초의 조약이며, 구미 여러 나라에 대한 문호개방의 효시가 되었다.
동헌 대청마루
화도진 책임자가 온돌방에서 외부인을 접견하는 장면
동헌 마당 왼쪽편에 있는 창고로 사용되었던 큰 건물. 앞면 6칸의 큰 창고건물로 아마도 해안방어를 위해 설치했던 포대를 지원하기 위한 무기, 식량 등을 보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른쪽에도 창고로 사용되었던 큰 건물이 있는데, 지금은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동헌 뒷편에 세워진 작은 정자인 육모정
동헌 왼쪽편에는 화도진 책임자가 머무는 숙소인 내사 건물이 있다. 'ㄱ'자형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방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족들이 머무는 공간으로 설명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화도진을 왕래하는 중앙관리들 묵었던 숙소로 생각된다. 일반 관아 건물의 내아 건물에 비해 방이 많은 편이다.
내사에는 가족이 생활하는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내사는 안주인의 거처로 안채라고도 부르며 기능상 비중이 크고 활용빈도가 높은 공간이다. 안방에는 보료, 반짇고리, 병풍과 머릿장, 패물함, 서안, 버선장, 3층장, 반닫이장 등을 짜임새 있게 꾸미는 것이 보통이며, 대청마루에는 찬장과 쌀뒤주, 장탁자들이 놓인다. <출처:인천시청>
내사에서 동헌으로 출입하는 통로
문간채 형식으로 지어진 내사 출입문. 부엌, 행랑채, 광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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