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304호로 지정된 여수 진남관은 현존하는 가장 큰 목조건축물 중의 하나로 여수에 있었던 전라좌수영 객사 건물이다. 객사는 관아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중앙 정청 내부에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전패)을 모신 함을 두고 고을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날 또는 국가적인 큰 일이 있을 때 국왕을 향해 절을 올리는 '향월 망배' 의식을 거행하는 장소이지만, 실제로는 지방관아를 방문한 중앙 또는 지방의 관리들이 공적인 업무를 여행을 할 때 머무는 장소이다. 객사는 거의 모든 관아에서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건물이 여수 좌수영 객사인 진남관과 통영 통제영 객사인 세병관이다. 이는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남해안이 왜구의 침입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기때문에 강한 수군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때문에 수영과 남해안의 주요 포구에 수군기지인 진(鎭) 등이 설치되었다. 통제영이나 수영에 상당히 큰 규모의 객사가 설치된 것은 비상시를 대비하여 수영 관할 진(鎭)이나 고을 수령들이 함선이나 어선들을 모아서 훈련을 해야 했고, 비상시에는 수영에 모여서 함대를 편성해서 해전에 치루어야 했기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전라좌수영 객사인 진남관은 정유재란 때 원래 있던 진루가 불타버렸던 것을 통제사겸 전라좌수사 이시언이 세운 75칸 규모의 대규모 객사이다. 현재의 건물은 1716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718년 수사 이제면이 중건하였다고 한다. 진남관은 앞면 15칸, 옆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직사각형의 땅에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자연석으로 초석을 놓고 68개의 기둥을 세워 놓고 있다. 남쪽의 왜적을 진압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뜻을 가진 진남관의 중건기는 1952년 보수 공사 중에 발견되었는데, 글씨는 중건 당시에 이제면이 쓴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면모가 곳곳에 서려 있는 핵심적인 유적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지방 관아 건물 중에서 가장 크다. 일제강점기에 여수공립보통학교 건물로 사용하는 등 학교 건물로 사용하다가 해방 이후 원형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충무공 이순신과 여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에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이곳 여수에 부임하여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전라좌수영의 본영이었던 여수는 거북선을 처음으로 출정시킨 곳인데, 1593년(선26) 8월부터 1601년(선조 34) 3월까지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기도 하였다. 이순신의 수군이 옥포, 합포, 당항포, 율포, 노량, 명량, 한산도 등에서 거둔 승리는 조선이 왜적에게 7년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여수에는 충무공 이순신의 발자취가 곳곳에 문화유적으로 남아 있다. 거북선을 최초로 만든 선소, 공의 공적을 새긴 통제이옹수군대첩비, 공을 추모하여 세운 눈물의 비석 '타루비', 국내 최초로 세워진 이순신 사당 '충민사'가 있다. 또한 나라를 구하는 데 앞장선 승려들의 흥국사도 있으며, 송현마을에는 효성이 지극했던 공이 전쟁중에 어머니 변씨를 모셔와 보살핀 곳도 있다.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가 없었을 것이다'라는 이순신의 글을 되새기게 하는 이곳 여수는 임진왜란 때 위태로운 나라를 지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 <출처:여수시청>
진남관, 국보 304호, 여수시 군자동 472
진남관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지휘소로 사용한 진해루가 있던 자리에, 1599년(선조32) 통제사 이시언에 의해 건립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716년(숙종42) 화재로 불탄 것을 1718년(숙종44) 전라좌수사 이제면이 이순신 전사 120년이 되는 해를 기려서 다시 세운 것이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 여수공립보통학교 등으로 사용되면서 크게 훼손되었다. 남쪽의 왜적을 진압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뜻을 가진 진남관의 중건기는 1952년 보수 공사 중에 발견되었는데, 글씨는 중건 당시에 이제면이 쓴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면모가 곳곳에 서려 있는 핵심적인 유적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지방 관아 건물 중에서 가장 크다. 진남관 앞에 있는 2개의 돌기둥은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있을 때 수군들이 밤 훈련을 위해 불을 밝힐 목적으로 사용하던 것이다. 당시에는 4개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개만 전한다. <출처:여수시청>
국보 304호로 지정된 여수 진남관. 전라좌수영 객사로 정면 15칸, 측면 5칸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단층 목조건물 중 가장 크다. 임진왜란때 이순신이 지휘소로 사용한 진해루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진남관 현판. 진남관 앞면 15칸에 이르는 상당히 큰 건물로, 68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둥은 민흘림 수법으로 보여 수고 있으며 그 위의 공포는 2출목의 다포계 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바깥쪽으로 용머리 장식을 사용하였다. 앞에 있는 돌기둥은 좌수영 수군이 밤에 훈련을 할 때 횃불을 밝히던 돌기둥이라고 한다.
지붕을 받치고 있는 공포는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 다포계 양식이 반영되었으며, 용머리 장식을 하고 있다. 국왕을 상징하는 건물로 겹처마에 단청을 화려하게 입혀 놓고 있다.
건물은 직사각형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초석을 놓고 원형 기둥을 올려 놓고 있다.
진남관 내부. 내부는 약 240여평에 이르는 넓은 공간으로 궐패(전패)를 놓는 중앙 정청을 제외하고는 많은 인원이 숙박을 할 수 있는 장소이다. 전라좌수사가 통제사를 겸할때 산하 관헌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거나 훈련을 할 수 있도록 객사 건물을 아주 크게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인 관아의 객사는 중앙에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는 방문자가 묵을 수 있는 온돌방을 양쪽에 두는 데 비해서 좌수영객사는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묵을 수 있도록 개방된 형태를 하고 있다.
국왕을 상징하는 중앙 정청 마루.
천장은 서까래가 보이는 연등천장을 하고 있다.
민흘림기둥을 하고 있는 객사 기둥과 초석
2008년 여수 진남관
여수석인. 임진왜란 당시 적의 눈을 속이기 위해 돌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세운 것이라고 전해 오는 석조물이다. 원래 7개였다고 하나 6개는 없어지고, 두건에 도포를 입고 팔짱을 낀 전형적인 문인형상을 하고 있는 이 석인상만 유일하게 남아 있다. 이 하나의 비석으로 당시의 의인전술을 밝히기는 어려우나, 조선 중기 돌 신앙으로서의 민속학적 가치와 조각작품으로서의 예술적 가치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여수 진남관에서 내려다 보이는 여수 앞바다. 지금은 도심 건물들이 해안을 막고 있지만, 원래 진남관에서는 포구에 정박하고 있는 배들과 돌산도 사이의 좁은 바다를 오가는 배들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게 되어 있다. 여수 앞바다에 선박들을 뛰어 놓고 훈련을 지휘하기에 좋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여수 앞바다에서 보이는 진남관. 진남관에서 깃발이나 횃불 등으로 보내는 신호에 따라서 훈련을 하기에 좋은 위치에 진남관이 자리잡고 있다.
전라좌수영, 조선시대 남해안 방위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여수에 자리잡고 있던 수군영이다. 1479년(성종10) 처음으로 설치되었고, 1895년(고종 32)에 없앴다. 현재 그 모습을 거의 잃은 채 성곽의 극히 일부와 진남관만이 남아 있다. 조선 후기 기록에 의하면 당시 전라좌수영 성안에는 건물 80여동, 민가 2024호, 우물 9곳, 연못 1곳 등이 있었다고 한다. 봄이면 주변에 매화가 만발하여 매영성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삼도수군통제영,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의 수군을 이끌고 경상도 해전에서 여러 번 승리를 거두어 1593년(선조 26)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수군을 다스리는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직함으로써 전라좌수영이 1601년(선조 34)까지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었다. <출처:여수시청>
전라좌수영이 있었던 진남관 일대. 전라좌수영에는 객사인 진남관을 비롯하여 600여칸, 78동의 건물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현재는 진남관만이 남아 있고, 관아 출입문 문루인 망해루와 통제문이 복원되어 있다.
전라좌수영 문루인 망해루
망해루 앞으로는 여수항과 직접 연결되어 있고, 바다가 바로 내려다 보인다.
진남관 계단에서 내려다 보이는 망해루
객사 출입문인 통제문
진남관 야경
여수항 맞은편 돌산도에서 본 여수항 야경. 조명을 비춘 진남관이 오늘날까지도 여수항의 중심이 되는 건물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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