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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_정원

서울 성북동 심우장, 만해 한용운 선생이 살았던 성밖마을 소박한 한옥

younghwan 2012. 10. 31.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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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김광섭의 시 <성북동 비둘기>의 분위기가 남아 있는 서울 성북동 서울성곽 바깥 북향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심우장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자 <님의 침묵>의 시인인 만해 한용운 선생이 만년에 살았던 집이다. 말년에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마련해준 조그마한 거처로 서민들이 거주하던 성북동 성밖마을 언덕에 자리잡은 크지 않은 저택이다. 총독부를 등지고 있다는 의미를 가진 북향집으로 앞면 5칸짜리 소박한 한옥이다. 원래 선방을 지으려고 마련해 두었던 땅에 지은 집으로 마당은 넓은 편이며, 마당에서 성북동 골짜기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김광섭의 시 <성북동 비둘기>에 등장하는 채석장이 있는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풍경이다. 심우장은 불교에서 소를 찾는 동자가 산속에 헤메는 모습에서 깨우침을 찾아 수행하는 과정을 비유한 것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심우장은 앞면 4칸, 옆면 2칸으로 부엌이 있는 1칸이 뒤로 돌출한 'ㄴ'자형 공간배치를 하고 있는 5칸 규모의 소박한 한옥이다. 가운데 2칸은 대청마루로, 왼쪽 1칸은 서재 겸 침실로 사용한 온돌방, 오른쪽 1칸은 부엌으로 사용하고 있다. 대청과 온돌방에는 반자틀 천장을 하고 있으며, 부엌에는 서까래를 노출시킨 연등 천장을 하고 있다. 서재로 사용 온돌방에는 우세창이 전서체로 쓴 '尋牛堂 심우당'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서민들이 옹기종기 모여살았던 성밖 마을 언덕에서 서민들과 함께 살아왔던 만해 한용운의 삶이 녹아 있는 작은 저택이라고 할 수 있다.

만해 한용운 심우장, 서울 성북구 성북동
이 집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자 <님의 침묵>의 시인인 만해 한용운이 1933년부터 1944년까지 살았던 곳이다. 동쪽으로 난 대문을 들어가면 북쪽으로 향한 기와집인 심우장과 양옥의 관리사 그리고 만해가 직접 심었다는 향나무 등이 있다. 심우장은 전체 규모가 5칸에 불과한 작은 집으로, 이곳에는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온돌방, 오른쪽에 부엌, 부엌 뒤로는 식사 준비를 하는 공간인 찬마루방이 있다. 한용운의 서재였던 온돌방에는 심우장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이름은 깨우침을 찾아 수행하는 과정을 소를 찾는 일에 비유한 불교 설화에서 따온 것이다. 심우장이 있는 성북동 일대는 1930년대 서울이 확장되면서 주거지로 개발되었는데, 이 집은 당시의 여느 집과는 다르게 검소하고 소박한 구성을 보여 준다. 한용운은 조선의 불교를 개혁하려고 했던 승려이자 조국의 독립에 힘쓴 독립운동가이며 근대 문학에 큰 업적을 남긴 시인이었다. 한용운이 만년을 보낸 심우장은 그의 이 같은 면모를 살필 수 잌ㅆ는 역사의 현장이다. <출처:서울시청>



만해 한용운 선생이 만년에 살았던 작은 저택인 심우장. 앞면 4칸에 'ㄴ'자 형태를 하고 있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소박한 한옥이다. 가운데 2칸은 대청마루, 왼쪽 한칸은 서재로 사용한 온돌방, 오른쪽 1칸은 부엌으로 사용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한옥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대청마루 앞에 유리가 있는 미닫이문을 사용하고 있는 등 일제강점기 개량한옥의 형태도 반영되어 있다.


성북동 골짜기를 흐르던 개천을 복개한 도로에서 심우장이 있는 성밖마을 언독으로 올라가는 길. 최근에 심우장을 찾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언덕길에 나무계단을 설치해 놓고 있다.


심우장 올라가는 봅은 골목길. 일제강점기 이래로 서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성밖마을의 모습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심우장은 성밖마을에서 높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성밖마을 골목길에서 내려다 보이는 성북동 골짜기. 시인 김광섭의 시 <성북동 비둘기>에서 묘사한 돌깨는 소리가 요란한 채석장이 있던 골짜기는 서울의 대표적인 부유층들이 저택이 몰려 있는 부촌으로 변했고, 서민들이 옹기종기 모여살던 남쪽편 성밖마을은 아직도 60~70년대 분위기가 남아 있는 서민 주택가를 형성하고 있다.


심우장 앞 골목길

심우장의 내력
만해 한용운이 법신의 향기 남겨놓고 떠난 지 반세기가 넘은 성북동 심우장에는 아직도 만해를 찾는 순례자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민족 자존의 역사를 간직한 심우장이기 때문이다. 성북동은 성밖 마을 북장골로서 송림이 우거진 한적한 동네였다. 이 터는 만해선사를 따르던 안국동 선학원의 벽산 김적음 스님께서 초당을 지으려고 북장골 송림중에 52평을 마련하여 두었던 터였다. 적음 스님께서는 만해 선사의 만년을 위하여 내어드린 것이 발전하여 심우장을 짓게 된 동기다. 후학 동지들도 나중에 협찬을 하여 후일 52평의 땅도 더 보태게 되어 지금의 100여평의 땅에 심우장을 짓게 되었다. 조선총독부 청사를 마주보기 싫어 북향집이 되었다는 일화를 간직한 집이다. 만해의 심우장은 송림에 숨은 산방인데 매우 한적하고 생활은 청빈하였다. 정원에는 많은 화초를 재배하여 감상으로 삼았고, 만해가 손수 심은 향나무 한그루 만해의 기상을 닮아 늘 푸르게 오늘날에도 잘 자라고 있다. 심우장에서 만해는 유마경 원고를 번역하였고, 신문, 잡지 등에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였고, 찾아오는 많은 방문객들에게 언제나 호의를 갖고 대하였으며,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청년들에게는 "조금도 실망하지 말게, 우주 만유에는 무상의 법칙이 있네, 절대 진리는 순환함이네, 다만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일세. 몸과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사람의 본분을 잘 지키면 자연히 다른 세상이 올것일세." 하면서 자상하게 타이르시던 삶의 체취가 풍기던 심우장이다. 심우장은 현재 서울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심우장>


심우장은 앞면 4칸 규모의 소박한 한옥으로 일제강점기 한옥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만해 한용운 선생과 관련된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는 대청마루


대청마루 내부. 지금은 온돌방처럼 바뀌어 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집필활동을 하던 서재로 사용하였던 왼쪽 1칸짜리 온돌방.


우세창이 전서체로 쓴 '尋牛堂 심우당'이라 적힌 현판.


찬마루와 아궁이가 있는 부엌


만해 한용운 선생의 친필


유심, 만해가 발행한 월간지로 1918년 2월에 창간. <유심>은 3.1 독립운동에서 전단지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애국계몽운동의 성격을 띤 종합 교양잡지이다.


만해한시집, 만해 한용운이 전 생에 걸쳐 지은 한시 164수를 수록한 시집


김법린 선생의 심우장 관련 친필원고


님의 침묵


만해 한용운 관련 신문기사


심우장 마당


마당 한쪽편에 있는 붉은 벽돌로 지은 관리동 건물


심우장 마당에서 내려다 보이는 성북동 골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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