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은 한양도성 북쪽 성밖에 있는 마을로 북향을 하고 있는 성밖마을과 고급 주택들이 들어서 있는 북악산자락 아래 남향을 하고 있는 주택가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마을이 크지 않고 도성수비를 하는 군대가 주둔하는 곳이기도 했다. 성북동에는 일제강점기 이후 도시가 확장되면서 도성 바깥쪽 언덕에 서민 주택들이 들어섰던 것으로 보이며, 그 중에서는 별장 형식의 한옥들도 있다. 지금도 성북동에는 일제강점기에 지은 한옥들이 몇채 남아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만해 한용운 선생이 살았던 심우장, 작가 이태준이 살았던 가옥, 중앙박물관장을 지냈던 최순우 옛집, 일제강점기 부호였던 이종석 별장 등이 있다.
성북동 골짝기에서 중간쯤에 위치한 상허 이태준 가옥은 지금은 복개해서 보이지 않지만, 성북동 개울이 내려다 보이는 성북구립미술관 뒷편에 위치한 아담하지만 화려하게 지어진 한옥이다. 이 가옥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집장사집으로도 잘 알려진 북촌의 한옥과는 약간 다른게 19세기 한옥의 형태가 남아 있는 가옥으로 누마루가 있는 별장같은 가옥이다. 문인이었던 작가의 취향이 많이 반영된 한옥이라 할 수 있다. 이태준가옥 맞은편 언덕 덕수교회 뒷편에는 일제강점기 부호로 알려진 이종석의 별장이 있다. 이 가옥은 안채와 행랑채로 이루어져 있으며 안채 오른쪽에는 큰 누마루를 두고 있다. 일제강점기 부호가 구한말 권문세가의 대저택을 모방하여 별장건물로 성밖 경치좋은 언덕에 별장을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허 이태준 가옥, 서울 성북구 성북동
이 집은 상허 이태준이 1938년부터 1946년까지 살면서 많은 문학작품을 집필한 곳이다. 이태준은 이곳의 당호를 '수연산방'이라 하고, <달밤>, <돌다라>, <코스모스 피는 정원>, <황진이>,<왕자호동> 등 문학작품 집필에 전념하였다. 그의 수필 <무서록>에는 이 집을 지은 과정과 집터의 내력 등이 쓰여 있다. 이 집은 건물 중앙의 대청을 중심으로 하여 왼쪽에 건넌방, 오른쪽에 안방을 두어 '工'자형을 이루고 아담하면서도 화려하게 지어졌다. 이 건물의 안방 앞에는 누마루를 두고 그 뒤편에는 부엌과 화장실을 두어서, 공간의 기능을 집약시킨 독특한 구성을 보여 준다. 누마루는 작은 규모의 집에서는 보기 드물게 섬세하고 화려하며 사랑방의 기능을 안채에 집약시켰다. 건넌방 앞에 놓인 툇마루는 건넌방보다 바닥을 약간 높이고 '아(亞)'자 난간을 둘러서 세심하게 고려한 공간임을 느끼게 한다. <출처:서울시청>
성북동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는 작가 상허 이태준 살았던 고택이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한옥으로 당시에 유행했던 'ㅁ'자형 구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별장이나 정자처럼 '-'자형 주택에 누마루를 달아내어 놓은 형태이다. 앞면 4칸 규모로 크지 않은 저택이지만 누마루를 설치하고 건넌방 툇마루에는 '亞'자 난간을 둘러 화려하게 꾸며진 저택이다. 마당은 넓지 않지만 크고 작은 정원수들을 많이 심어 아기자기하면서도 아늑한 느낌을 주는 한옥이다.
이대준가옥은 지금은 성북동 중심을 가로지는 큰 길이 있는 성북동 개천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주택가에 위치하고 있지만, 크고 작은 나무를 많이 심어서 울창산 숲속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다. 이집은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난 상허 이태준이 1930년대부터 살면서 글을 쓰던 집이다.
이태준은 이곳의 당호를 '수연산방'이라 이름짓고 있다. 대문은 크지 않고 양반 저택의 쪽문 크기를 하고 있다.
작은 정자로 꾸며 놓은 누마루.
저택 가운데 2칸은 대청마루로 되어 있으며, 오른쪽에 안방이, 왼쪽에 건넌방이 있다. 대청마루는 일제강정기 주택양식이 반영되어 유리창이 있는 미닫이문이 있고 그 앞쪽에 걸터 앉아 정원을 내려다 볼 수 있는 툇마루를 두고 있다. 지금 이 가옥은 차를 마실 수 있는 찻집으로 바뀌어 있다.
마당 앞 정원에 있는 작은 우물. 한옥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일제강점기 일본의 영향을 받은 마당 정원이라고 할 수 있다.
마당 한쪽편에 꾸면 놓은 정원.
뒷편으로 들어가는 길 옆 언덕에도 크고 작은 정원수들을 많이 심어 놓고 있다.
건널방 온돌 아궁이와 그 옆에 있는 작은 출입문
상허 이태준 가옥 앞에 있는 성북구립미술관. 미술관 앞으로 큰 도로가 있는데, 성북동 골짜기를 흐르는 개천을 복개한 것으로 원래 개천을 내려다 보이는 경치좋은 곳에 별장처럼 지은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성북동 이종석 별장, 서울 성북구 성북동
이 집은 일제강점기에 부자로 널리 알려진 이종석이 성북동에 건립한 별장이다. 성북동 산자락에 위치한 이 집은 바깥마당에 우물이 있고, 일각대문을 지나면 행랑채와 안채가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행랑채는 특이하게도 'ㄱ'자형으로 일반적인 가옥의 공간 구성이다. 행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원래 담장이 놓여 있었는데, 여기 난 중문을 통해 안채로 드나들도록 되어 있었다. 'ㄱ'자형의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누마루를 두고 왼쪽에는 안방을 두었다. 누마루에는 원래 '일관정'이라고 쓴 글씨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양반가옥에서 볼 수 있었던 누마루를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조선 말기 신분에 따른 주거 형식의 경계가 허물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출처:서울시청>
미술관 맞은편에는 덕수교회가 있고 교회 안쪽으로 들어가면 일제강점기 부호였던 이종석이 지은 별장이 있다.
이종석 별장으로 올라가는 길. 교회부속건물 뒷편에 위치하고 있다.
한양도성 바깥쪽 숲속에 높은 축대를 쌓고 별장을 조성하고 있다. 꽤 넓은 부지위에 세워진 별장으로 현재 교회건물들도 이 별장에 속한 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운 벽돌로 담장을 쌓고 있다.
이 가옥은 사랑채를 겸하고 있는 안채 건물과 행랑채로 이루어져 있으며 앞면 6칸의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이다. 기단을 높게 쌓고 그 위에 집을 올려 놓고 있는데 건물의 높이도 일반 한옥에 비해서 높은 편이다. 궁궐 전각과 비슷한 형태로 지은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안쪽 끝에는 1칸 정도로 돌출된 누마루를 세워 놓고 있다. 이 집은 전체적으로 일제강점기 부호였던 집주인이 궁궐건물에 준하여 크게 건물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규모의 건물들은 성북동에 있던 요정이었던 길상사와 삼청각 본채에서도 볼 수 있다.
일반 한옥의 행랑채는 지붕이 낮고 작은 규모인데 비해, 이집 행랑채는 일반 한옥의 살림집처럼 지어놓고 있다.
이 저택 대문 앞에서 내려다 보이는 성북동
성북동 덕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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