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하회 충효당은 마을 종택인 양진당(보물 306호)과 함께 하회마을을 대표하는 고택으로 보물 414호로 지정된 문화재이기도 하다. 이 집은 조선중기 문신으로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함께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던 서애 류성룡이 종택에서 분가하면서 지었던 집터에 후손들이 세운 작은 종택이라 할 수 있다. 원래는 작은 초가집이었다고 하는데 그의 손자인 류원지가 사랑채와 안채를 짓고, 증손자인 류의하가 17세기에 크게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충효당은 전체적으로 낙동강이 바라보이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 안채는 북쪽에, 사랑채는 남쪽에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앞쪽에는 12칸의 긴 행랑채를 두고 있고, 사랑채 뒷쪽에 불천위 조상을 모시는 사당과 서애 류성룡의 유품을 전시하는 최근에 지은 영모각이 자리잡고 있다. 안채는 전형적인 경북지역 양반가옥의 주택형태인 'ㅁ'자형 건물배치를 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자형 사랑채를 달아낸 형태를 하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사랑채가 있는 영역과 내당인 안채는 담장으로 분리하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를 출입하는 문을 별도로 두고 있으며, 내부에도 출입문을 통해 안채와 사랑채를 드나들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는 남녀구별이라는 유교의식에 충실한 면도 있지만, 이 집을 드나드는 외부 손님이 꽤 많았기때문인것으로도 보인다.
서애 류성룡은 하회마을을 대표하는 인물로 조선중기 문신이자 임진왜란 극복에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로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이기도 했던 류성룡은 선조대에 다양한 벼슬을 거쳤으며, 임진왜란때에는 병조판서로서 이순신과 권율을 발탁하고 그들의 전략을 조정에서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던 인물로 임진왜란 극복에 기여한 공로는 충무공 이순신이나 권율에 비해 결코 적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의 과정에서 보면 영남사림을 대표하는 유학자이지만 군사.정치.외교 등 다방면에 있어서 상당한 식견과 실천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인물이다. 퇴계의 제자로 도산서원에 배향할 때 임진왜란 극복에 큰 역할을 했던 김성일과 서열을 정함에 있어서 제자들간에 큰 논쟁이 있었던 일화가 유명하며, 하외마을 동쪽편 병산서원에 모셔져 있다.
안동 하회 충효당, 보물 414호,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이 집은 서애 류성룡(1542~1607년)의 종택으로 17세기에 지어졌다. 류성룡이 벼슬을 마치고 귀향한 후에 풍산현에 있던 작은 초가집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의 손자와 제자들이 생전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충효당은 류성룡이 평소에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는 말을 강조한 데서 유래한다. 12칸의 긴 행랑채는 류성룡의 8세손인 류상조가 병조판서를 제수받고 부하군사들을 수용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출처: 안동시청>
안동 하회마을 충효당은 조선중기 문신 서애 류성룡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분가해 살던 작은 초가집을 후손들 중건한 17세기에 지어진 양반 가옥으로 그 원형이 많아 남아 있고, 역사적인 가치가 높아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하회마을 종택인 양진당과 함께 낙동강이 보이는 마을 남쪽끝에 자리잡고 있다.
총택이 양진당 앞 골목길에서 보이는 충효당. 'ㅁ'자형 건물인 안채와 '-'자형으로 달아낸 사랑채, 12칸에 이르는 행랑채와 불천위 조상을 모시는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충효당 출입문이 있는 12칸에 이르는 행랑채. 이 건물은 류성룡의 8세손인 류상조가 병조판서를 지내면서 수하 군사들이 잠시 묵을 수 있도록 크게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행랑채 앞 마당에 심어진 구상나무는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안동 하회마을 방문을 기념하기 위하여 심은 나무이다. 구상나무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한국고유의 수종으로 소나무과에 속하는 상록수이다.
사랑채로 들어가는 충효당 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솟을대문
안채 남쪽으로 달아내어 놓은 '-'자형으로 지은 긴 사랑채. 앞면 6칸의 큰 건물로 가운데 2칸은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오른쪽에는 안채와 연결된 온돌방으로, 왼쪽에는 난간이 있는 누마루나 정자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마루와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운데 대청무른 앞면 2칸으로 문중회의가 열렸던 종택인 양진당의 대청마루에 비해서는 좁은 편이다. 주로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던 대청마루라 할 수 있다.
충효당 대청마루.
가운데 대청무레 걸린 '충효당'이라고 쓴 현판은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유학자인 미수 허목이 쓴 글씨라고 한다. 이 현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후기에 상당히 많은 유명 인사들이 이집에서 묵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채 오른쪽 2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으며, 주로 집주인이 머무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안채와는 내부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왼쪽 2칸은 방과 마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로 손집을 접대하거나 이집을 방문한 중요한 손님들이 묵을 수 있는 방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명승지 등이나 별채 등에서 볼 수 있는 정자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옆면 2칸을 나누어 1칸은 방으로, 1칸은 마루로 사용하고 있다.
12칸에 이른 긴 행랑채는 사랑채와 안채에서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원래 행랑채를 지은 목적과 마찬가지로 후대에도 이 집을 방문한 손님들이 묵는 방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대문 바로 옆에는 외양간이 있다. 조선시대 양반가옥 대문 옆에는 외양간을 두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며, 주인이 사용할 말이나, 농사에 이용할 소를 키우는 공간이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담장을 두어서 공간을 분리하고 있으며, 문을 통해서 왕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실제로 이집에 사는 가족들은 건물내부의 통로도 함께 이용하고 있다.
충효당의 살림집이라 할 수 있는 안채는 'ㅁ'자형 구조로 상당히 큰 규모의 저택이다.
충효당은 사랑채 앞쪽에 있는 긴 행랑채 솟을대문을 두고 있지만, 안채 마당을 출입하는 대문을 골목길에 별도로 두고 있다.
충효당 안채는 본채건물에 날개채 형식으로 건물을 달아내어 놓고 있는데, 아래쪽에는 부엌이나 출입문, 작은 행랑방을 두고, 위쪽에 크고 작은 다락방을 두고 있는 2층건물처럼 지어놓고 있다.
사랑채 뒷편에서 본 안채.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안채 지붕의 장식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작은 쪽문
사랑채 뒷편에는 불천위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 있고, 사당 앞으로 정원을 아름답게 꾸며놓고 있다.
사당 앞 정원
사당 앞쪽에는 최근에 지은 충효당에서 소장한 서애 류성룡 유품을 전시하는 공간인 영모각을 두고 있다.
사랑채에서 남쪽편 정원으로 빠져 나오는 작은 쪽문
충효당은 하회마을 서쪽끝편에 자리잡고 있어서, 낙동강이 보이는 남.서 방향으로는 집들이 별로 없어서 전망이 좋은 편이다. 지금도 작은 초가집 몇동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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