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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하회마을 영모각, 서애 류성룡 종가 유물 (보물460호)

younghwan 2012. 11. 29.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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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 하회마을 충효당은 보물 414호로 지정된 고택으로 서애 류성룡이 살았던 집으로 역사적인 의의가 있는 곳이다. 하회마을 종택으로 그의 형 류운룡이 살았던 양진당(보물306호)과 이웃하고 있다. 원래 류성룡은 낙향하여 이곳에서 작은 초가를 짓고 살면서, 번잡한 마을에서 벗어나 낙동강 건너편 부용대 아래에 작은 정자인 옥연정사를 짓고 그곳에서 징비록을 비롯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다. 현재의 충효당은 그의 증손자인 류의하가 17세기에 크게 중건하여 지은 것으로 조선후기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충효당 뒷편에는 불천위 조상에 제사를 올리는 사당이 있고, 사당 앞쪽에는 류성룡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는 영모각이 있다. 류성룡 종가에는 많은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는데 임진왜란 극복과정을 손수 기록한 국보 132호로 지정된 <징비록>을 비롯하여, 보물 160호로 지정된 <류성룡 종가문적>, 종가에서 전해오는 주요 유물들인 보물 460호로 지정된 <류성룡 종가유물> 등이 있다. 그 중 보물 460호로 지정된 류성룡 종가 유물은 전해오는 유물들 중 특히 역사적, 자료적인 가치가 높은 유물들이다. 보물로 지정된 유물은 크게 류성룡이 직접 사용했던 갓, 홀, 신발 등과 그의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재산을 분배한 기록인 분재기, 조정에서 내린 녹권, 교지 등의 문서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의 개인사와 가족사, 사회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이라고 한다.


서애 류성룡 종가인 충효당 사당 앞에는 류성룡 종가에서 소장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영모각에는 국보 132호 <징비록>을 비롯하여, 보물160호로 지정된 류성룡종산가문적과 보물 460호로 지정된 류성룡종손가유물이 있다. 그리고 문붕에서 보관하고 있는 그 외 중요 유물 20종과 교지, 문서들이 다수 보관 전시되고 있다.


영모각 내부


서애 류성룡이 책을 읽고 있는 모습


서애선생 모부인 곤문기, 선생이 32세 때에 선친이 별세하여 유산이 어머니인 정경부인 김씨에게 상속되었다. 그로부터 20년후에 정경부인 김씨는 시댁과 친정의 제위도와 접빈용 토지를 나누고 나머지 유산을 자녀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준다는 뜻을 밝혔는데 이것이 그 기록이다. <출처: 영모각>


고종제문/제물단자, 보물460호, 임진년인 1892년(고종29) 고종 임금이 서애 선생의 묘우에 치제할 때의 제문과 나라에서 하사한 제물의 내용을 기재한 제물단자이다.


선조제문, 보물 160호, 서애 선생의 부음을 받은 선조임금은 승지 이유흥을보내어 조의를 표하고 예조좌랑 구혜에게 명하여 치제하게 하였는데 그때의 제문이다.


부의기, 보물460호, 서애 선생 부음을 접한 부원군 이호민이 평생을 청백하게 지낸 선생의 가세를 걱정하여 중신들에게 회장을 돌려 부의를 거두게 하였는데 이것은 그 목록이다.


봉조하녹봉, 1603년 조정에서 내려와 고향 초당에 계신 선생의 생계를 걱정하여 임금이 특명으로 하사한 녹봉이다.


병인문과방목, 1566년 선생이 25세 때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이것은 급제자의 명부이다.


어사화, 서애 선생의 8대손 유상조가 문과에 급제하여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종이꽃이다.


중원부원군 교지, 1590년 선생이 우의정 당시 광국공신풍원부원군으로 봉해졌으나 임진왜란이 끝나넌 1598년 반대파의 탁핵으로 관직을 박탈당했다. 그 2년 후인 1600년에 직택을 다시 돌려 받았으며, 1603년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는데 이것은 그 때의 교지이다.


광국원종공신녹권, 보물 460호, 서애 선생이 광국공신 풍원부원군에 서훈된 이후 그의 장자 또한 광국원종공신에 서훈되었는데 이것은 그 때 하사된 녹권으로서 갑인자로 인쇄된 임진왜란 전의 유일본이다.


정경부인교지, 선생의 부인 이씨는 1589년 선생이 예조판서로 계실 때 별세하였는데 그 후 선생이 영의정이 된 후 1596년 정경부인 교지가 내려졌다.


갓끈, 보물 460호, 서애 선생이 쓰시던 갓끈이다. 지위에 따라 재질이 다르다.


관자, 보물 460호, 망건의 당줄을 꿰는 작은 단추 모양의 고리로서, 조선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다른 관자를 썼다. 3품까지는 옥관자, 2품은 금관자, 1품이 되면 다시 옥관자를 쓰게 되어 재상이 되는 것을 환옥이라 하였다.


병산서원,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위치한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 선생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본래 이 서원은 고려말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으로 1572년9선조5)에 류성룡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1614년(광해군6)에 정경세 등 지방유림의 뜻으로 류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을 짓고 위패를 모셨다. 1629년에 류성룡의 셋째 아들 류진의 위패가 추가로 모시었으며, 1863년(철종14)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현재 사적 260호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영모각>


동국지도, 보물 460호, 서애 선생이 사도도체찰사로 재임시에 북방 오랑캐에 대비하기 위하여 두만강 일대 육진의 방어시설을 자세히 보고하도록 한 선생의 지시에 따라 함경도북병사가 그려서 올린 지도이다.


책상, 서애 선생이 사용한 책상이다. 뒷면에 이 책상의 내역을 적은 글귀가 있는데, "임진왜란을 극복한 선생의 탁월한 경륜과 높은 학문이 모두 이 책상 귀에서 나왔다"라고 쓰여 있다.


가죽신, 선생이 평상시에 신었던 가죽신인데 크기로 미루어 보아 선생의 체구가 장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유서통, 임금이 신하에게 중대한 사명을 내릴 때나 관찰사. 절도사.방어사 등이 부임할 때 내렸던 명령서를 유서라고 하였는데 이 대나무통은 유서를 담아서 사용하였던 것이다.


홀, 보물 460호, 조선시대에 벼슬아치가 왕을 만날 때에 손에 쥐던 물건으로 여기에 왕명을 기록해 두기도 하였다. 1품부터 4품까지는 상아홀, 5품 이하는 목홀을 썼다. 이것은 서애 선생이 사용하였던 상아홀이다.


허리띠,


갓, 보물 460호


허리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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