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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박물관] 충북의 불교문화와 흥덕사지 출토유물

younghwan 2013. 2. 6.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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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지역은 백두대간 속리산에 있는 법주사를 제외하고는 대형사찰이 많지 않지만, 조선시대 이전에는 남한강 수운과 백두대간을 넘는 고갯길과 연결된 육상교통로가 발달되어 이를 기반으로 한 호족세력이 강한 지역이었다. 불교 또한 호족세력의 비호아래 크게 발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청주지역에는 화려한 금속공예문화와 금속활자를 꽃피운 흥덕사, 용두사, 사뇌사 등 큰 사찰이 있었고, 충주지역에는 광종이 세운 숭선사, 미륵리사지 등이 있었으나 호족세력의 지원을 받던 사찰이었던 까닭에 조선시대에 폐사되고 절터만 남아 있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은 '직지'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이 직지는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직지'를 인쇄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흥덕사는 그 위치가 청주목 외곽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여러곳에 기록되어 있어 1985년 발굴.조사 결과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일대에서 '흥덕사'라고 새겨진 금고가 발견되어 이곳을 흥덕사 절터로 추정하고 있다. 절터에서는 치미를 비롯한 상당수의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금당터, 강당터 등 건물터 또한 그 일부가 확인되고 있다. 삼국시대에 주로 사용한 기와지뭉 용마루를 장식하던 치미가 발견된 점 등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창건되어 15세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충북의 불교문화
충북의 고대 불교문화는 고구려의 활달함과 백제의 부드러움, 신라의 소박함이 함께 묻어난다. 신라 통일 이후에는 충주의 중원경과 청주의 서원경을 중심으로 불교문화가 발전하였다. 청주 운천동 신라사적비와 충주 탑평리석탑 등은 불심을 담아 통일의 위엄과 국토의 중심임을 드러냈으며, 청주 운천동동종.보은 법주사석등과 석연지.괴산 각연사비로자나불상 등의 불교유산을 남겼다. 고려시대는 왕실과 지방호족의 지원을 받은 사찰이 건립되었고, 거대한 석불이 조성되었다. 고려 태조의 아들 중통국사는 청주 보살사와 보은 법주사를 중창하였으며, 충주 숭선사는 광종(925~975)이 어머니를 위해 발원하여 창건한 사찰이다. 충북과 영남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인 충주 미륵리에는 거대한 석굴사원이 세워졌다. 청주에는 용두사.사뇌사.흥덕사가 세워져 불교 금속공예와 인쇄문화의 꽃을 피웠다. 또한 청주 용화사, 진천 용화사, 충주 원평리, 미륵리 석불처럼 거대한 불상이 만들어졌으며 또 거란의 침입과 관련되 제천 사지빈신사와 공민왕이 태평을 기원한 영동 영국사 등 호국불교가 강조된 사찰도 건립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후 보은의 법주사 대웅보전, 팔상전이 재건되었고, 왕실과 관련이 깊었던 신미, 학조스님이 복천암에 주석하였다. <출처:청주박물관>


망새, 청주 흥덕사지, 새의 깃털 형태를 하고 있는 망새는 궁궐이나 사원의 용마루 위에 얹는 커다란 장식기와이다,. 주로 건물을 돋보이게 하며, 상서로움을 나타내거나 나쁜짓을 없애는 의미도 있다. 흥덕사 금당의 지붕을 장식했던 이 망새는 삼국시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흥덕사'가 새겨진 금고, 고려, 흥국사터, 서원부는 고려 건국부터 청주목으로 개칭되는 성종2년(983)까지 청주의 옛 지명이었다. 이 금고의 출토로 <직지>의 간기에 기록된 흥덕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직지심체요절(고려, 1377년, 복제품), 고려말기의 고승인 경한(1299~1375)이 역대 여러 부처와 고승들의 법어, 대화, 편지 등에서 중요한 내용을 뽑아서 편찬 것이다. 중심주제는 사람이 마음을 바르게 가졌을 때 그 심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책 말미의 간기를 통해 1377년 청주목 흥덕사에 활자를 주조하여 인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청주 흥덕사와 직지이야기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은 '직지'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이 직지는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직지'를 인쇄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용두보상, 고려, 청주 흥덕사터,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 장식의 보당이다. 한 쌍으로 주조되었으며, 여의주 앞족으로 조그마한 고리가 있어 어떠한 기능적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용머리의 목에는 용의 비늘이 도식적으로 표현되었다.


청동바루, 청주 흥덕사터


광명대, 고려, 청주 중앙동, 상부가 편평한 원반형을 이루어 등촉을 올려 놓도록 구성된 일종의 촛대로 '광명대'라고 부른다. 동종, 청주 흥덕사터, 전체 높이가 17.5cm 가랑 되는 아주 작은 크기의 종이다. 여의주를 잡은 용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고 종신에는 구름속에 보살상 4구가 새겨져 있다. 천판위에 입상화문대와 간략화된 문양 표현은 고려 후기 범종의 특징을 보여준다.


'황통10년'이 새겨진 바루, 고려, 1150년, 청주 흥덕사터


용두사지철당간, 청주 남문로, 복제품. 청주 남문로에는 고려시대 용두사라는 큰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철당간만이 남아 있다. 당간은 절입구나 법당 앞에 깃발이나 괘불을 거는 것으로 돌로 된 지주대를 마주보게 세우고 그 사이에 철이나 돌로 당간을 세웠다. 당간 몸체에는 당간을 세운 목적을 담은 명문이 새겨져 있다. "962년 청주 호족 김예종이 병에 걸리자 철당간을 바쳐 절을 장엄할 것을 맹세하며 사촌형 의일 등과 함께 철통 30단을 주조하여 높이 60척의 철당을 세운다." 이글에서 '준풍3년'이라는 광종의 독자적인 연호와 함께 청주호족과 하교 관련 내용이 있어 고려초기 지방사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출처:청주박물관>


연꽃무늬서까래기와(고려, 충주 승선사터), 얼굴무늬수막새(충주 미륵리 절터), 도깨비얼굴무늬수막새(청주 운천동)


호랑이.사슴그림암키와(고려, 충주 미륵리 절터), 말그림암키와(충주 미륵리 절터)



대방광불화엄경 권13, 고려, <대방광불화엄경>은 줄여서 <화엄경>이라 부르는데,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기본 사상으로 하고 있다. 중국 동진의 승려 불타발다라가 번역한 <화엄경> 진본 60권 중 권13으로 목판본이다. 간행기록은 없지만 서체나 체제면에서 초조본 대장경과 유사하며, 대장경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묘법연화경 권제7 변상도, 조선, '묘법연화경'은 '법화경'으로 약칭되는데, '무엇보다 바른 백연꽃과도 같은 가르침'이라는 의미이다. 전7권 중 마지막 7권으로 백지에 금니로 그렸다. 좌측하단에는 재난을 당한 사람들이 관세음보살을 염원하자 구제받는 재난구제 장면이 보인다.


화엄경 권제47 변상도,


감로도


지장보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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