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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선 유적_왕릉

서울 노량진 사육신 역사공원, 단종복위를 꾀하다 처형당한 사육신 묘소

younghwan 2013. 2. 18.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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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경부선 철도가 지나가는 한강변 언덕에 위치한 사육신 공원은 조선초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대응하여 단종복위를 꾀하다 목숨을 잃은 사육신의 무덤에 조성된 공원이다. 원래 이곳에는 단종복위 사건에 가담하여 참혹하게 처형된 성승,박팽년,유응부,성삼문,이개 다섯분의 시신을 어느 스님이 현재의 위치에 모셨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숙종대에 사육신이 복위되면서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의 가묘가 새로이 모셔지고 산기슭에 이들을 모시는 민절서원이 세워졌다. 현재 민절서원은 남아 있지 않고 1970년대 사육신묘 부근을 성역화 하면서 의절사라는 사당을 세우고 주변을 공원화하여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고 한다.

 조선초기 단종복위를 꾀하다 참혹하게 처형을 당한 사육신들은 박팽년을 제외하고는 그 후손도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비록 많은 곳에서 이들을 위한 제사를 올리고 있다고 하지만 일족이 멸문을 당해서 웬지 쓸쓸해 보이는 곳이 이곳 사육신 공원이다. 지금도 큰 도로와 철도, 한강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외로운 느낌을 주는 곳에 입지하고 있으며, 사육신 공원이 입지한 노량진은 오랜 세월 동안 대학입시에 낙방한 재수생,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고시준비생들 터를 잡고 살고 있는 서울에서도 쓸쓸한 느낌을 많이 주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사육신묘,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이곳은 조선 6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목숨을 바친 사육신을 모신 곳이다. 단종 3년 음력 윤 6월(1455)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고 즉위하매 이에 의분을 품은 충신들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탄로되어 참혹한 최후를 마치니 이들을 훗날 사육신이라 부르고 있다. 사육신의 충성심과 장렬한 의기를 추모하고 숙종 7년(1681) 이 산 기숡에 민절서원을 세웠고, 정조 6년(1782)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전해오다가, 1955년 5월에 육각의 사육신비를 세웠다. 1978년 서울특별시에서는 이 의로운 충혼들을 위로하고 불굴의 충의 정신을 널리 현창하고자 3,240평이었던 묘역을 9,370평으로 확장하고 의절사, 불이문, 홍살문, 비각을 새로 지어 충효사상의 실천도장으로 정화하였다. 본래 이 묘역에는 박팽년, 성삼문, 유응부, 이개의 묘만 있었으나 그 후 하위지, 류성원, 김문기의 허묘도 함께 추봉하였다. <출처:서울시청>


서울 한강 이남의 서울에서도 교통량이 제일 많았던 노량진 나루터 부근 언덕에 조성되어 있는 사육신 공원. 한강, 경부선철도와 큰 도로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위에는 주택이 많이 들어서 있지 않은 외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사육신공원으로 올라가는 길.


사육신을 모시는 사당인 의절사 입구임을 알려주는 홍살문, 원래 있던 것은 아니고 1970년대에 의절사를 조성하면서 세운 것이다.


사육신을 모신 무덤 앞에 의절사라는 사당이 있다. 원래 사육신을 모시는 사액서원인 민절서원이 있었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고, 1970년대에 이곳을 성역화하면서 사당을 세웠다고 한다.

사육신은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에게 신임을 받았고 문종에게서 나이 어린 세자(단종)을 잘 도와 달라는 명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 처형당한 충신돌이다.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이 1453년(단종1) 계유정난으로 안평대군과 황보인, 김종서 등을 숙청하고 권력을 독차지한 끝에 1455년에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이들은 동조자를 모아 단종을 다시 위위에 앉힐 것을 결의하고 그 기회를 살피고 있었다. 1456년 6월, 이들은 본국을 돌아가는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가 국왕 양쪽으로 칼을 들고 지켜지는 운검을 하게 되는 것을 기회로 세조 일파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운검이 취소되자 실행을 미루었다. 이에 같은 동지이며 집현전 출신인 김질 등은 뒷일이 두려워 세조에게 단종 복위 음모를 일러바쳤고 세조는 연루자를 모두 잡아들여 직접 이들을 심문하였다. 이떄에 주모자들 가족 중 남자는 모두 처형당하였고 여자들은 노비가 되었다. 이 충신들은 1691년(숙종17) 숙종 때 관직이 복구되었고, 노량진 동산의 묘소 아래 민절이라는 사액이 내려진 서원에 신위가 모셔져 제사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출처: 서울시청>


사육신을 모신 사당인 의절사. 정면에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고, 마당 왼쪽편에는 정조대에 세운 신도비, 오른쪽에는 1955년에 세운 비석이 있다.


정조대에 세운 신도비를 모신 비각


사육신 신도비


1955년에 세운 육각형의 비석


사육신 위패를 모신 사당인 의절사


의절사 내부


사당 뒷편에는 사육신을 모신 무덤이 있다. 원래 이곳에는 단종복위사건에 가담했던 처형된 성승.박팽년.유응부.성삼문.이개 다섯분의 시신을 어떤 스님이 모셨다고 하며, 임진왜란 이후 성승의 묘는 찾지를 못하고 숙종대에 사육신이 복권되면서 하위지.유성원.김문기의 가묘를 같이 모셨다고 한다.


사육신 무덤


사육신 공원에 조성된 단종충신역사관


역사관 내부에는 계육정난과 단종복위사건, 사육신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적어 놓고 있다.


감옥을 재현한 모습


노량진 사육신 공원


사육신 공원에서 내려다 보이는 한강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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