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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선 유적_왕릉

남양주 홍유릉 홍릉(사적 207호), 대한제국 황제의 능으로 조성한 조선 26대 고종과 명성황후 합장릉

younghwan 2013. 3. 14.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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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릉은 조선 26대 고종과 명성황후의 합장능으로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홍릉은 이전의 왕릉과는 달리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때문에 황제의 예를 따라서 능을 조성하였다. 홍릉은 기존 왕릉의 제사시설이었던 정자각을 없애고 대신 '-'형의 앞면 5칸짜리 침전을 세워 놓았으며, 능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대신 침전앞 참도 양쪽으로 문.무석인과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 석상을 순서대로 세워 놓고 있다. 참도도 기존에 어도와 신도의 2단으로 되어 있던 것을 3단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능역 입구에 위치해 있던 재실 또한 왕릉 바로 앞으로 옮겼으며, 그 규모 또한 상당히 큰 재궁을 조성해 놓고 있다.

 홍릉은 1895년에 명성황후가 경복궁 건청궁에서 일본인에 의해 시해된 이후 능역 조성을 미루다, 1897년에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명성황후라는 시호를 내리고 청량리 부근에 홍릉을 조성하면서 능의 이름이 정해졌다. 청량의 홍릉은 조성된 직후부터 석물에 문제가 생겼고, 풍수상 좋지 않다는 의견이 많아서 고종은 남양주 금곡동에 새 능역을 정하고 황제국에 걸맞은 능제를 마련하고 능역조성을 시장하였다. 침전은 1904년에 완성되었으며, 1904년까지 주요 석물들이 완성되었다. 그 이후 홍릉의 이장은 실현되지 못하다가 1919년 고종 사후에 능이 이곳에 고종의 능을 조성하면서 명성황후의 능과 합장하였다. 홍릉은 조선이 망한 이후인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왕릉이지만, 고종의 생전에 황제국의 위상에 걸맞는 능역을 조성해 왔으며 고종 사후에 3.1만세운동이 일어나는 등 민심이 좋지 않아서 일제가 고종이 추진하던 내용대로 홍릉을 조성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집권기간 동안 외세에 휘둘리면서 조선을 멸망에 이르게 했지만, 능역의 규모는 이전 왕릉에 비해서 크고 웅장하게 지었다.

홍릉, 사적 207호,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릉은 조선 26대 고종과 황후인 명성황후의 능이다. 고종은 철종3년(1852) 7월 25일,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63년 철종이 자손이 없이 승하하자 12세의 어린 나이로 창덕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처음 10년간은 흥선대원군이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직접 나라를 다스렸으나 정치적 실권은 명성황후의 친인척인 민씨 일족이 장악하였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연호를 광무라 하여 자주 독립국가로서의 면목을 세계에 알리고자 하였다. 1907년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보호하고자 세계만국평화회담이 열리고 있는 네덜란드 헤이그로 밀사를 파견하였으나, 고종이 재위하던 44년간은 외세의 침입이 잇탈았던 격동기였다. 고종은 이를 막아내려고 노력하였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1919년 1월 21일 67세로 덕수궁 함녕전에서 돌아가셨다. 고종의 장례일인 3월1일에는 전국에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명성황후는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로 고종3년(1866) 16세에 왕비가 되었고, 고종 11년(1874) 왕자인 순종을 낳았다. 고종의 친정 이후 황후의 친인척인 민씨 일족이 실권을 장악하였으나 정치활동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임오군란(1882) 때에는 충주로 피신하여 겨우 목숨을 건진 일도 있었다. 명성황후는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와 러시아의 세력을 끌어 들여 정치적 기반을 다지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정책은 일본을 자극하였고 결국 일본공사가 보낸 자객에게 1895년 10월8일 경복궁 건청궁에서 암살되었다. 1897년 명성황후로 추존되었으며 1919년 고종이 돌아가시자 처음 안장하였던 청량리 홍릉에서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출처:문화재청>

고종 승하와 3.1운동
고종은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일본에 의하여 강제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난 후, 1919년 1월 경운궁(덕수궁)에서 돌아가셨다.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은 일제의 폭압적인 통치와 경제적 수탈에 시달리던 민중들에게 항일운동의 커다란 기폭제가 되었다. 3.1운동은 각 종교계의 민족 지도자들과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계획하여 고종의 발인을 이틀 앞두고 거행되었다. 서울에서 시작한 이 만세 운동은 황제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하여 전국에서 상경한 민중들이 각 지방에 영향을 미쳐 3.1운동이 전국적인 규모의 만세운동으로 확산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출처:문화재청>


남양주 금곡동에 위치한 조선 26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합장능인 홍릉. 기존 왕릉과는 달리 봉분 앞에 제사시설로 앞면 5칸짜리 큰 건물인 침전을 세우고, 홍살문에서 침전까지 연결된 참도 또한 3단으로 되어 있다. 봉분 주위에 있던 석물들도 대부분 침전 앞으로 옮겨졌으며, 기존의 석양, 석호 대신에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 모양의 석상이 참도 양쪽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고종.명성황후 홍릉,
홍릉은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1대 황제인 고종(1852~1919년), 명성황후(1851~1895년)를 합장하여 모신 능이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1895년 을미사변으로 돌아가신 후 처음에 그 능을 동구릉 안에 조성하고자 하였지만 국내외의 복잡한 사정으로 제대로 조성하지 못하였다. 1897년 10월 명성황후를 대한제국의 황후로 높이고, 같은해 11월에 능 이름을 홍릉으로 새로 정하여 서울시 청량리에 모시게 되었다. 명성황후의 청량리 홍릉은 조성 직후부터 석물에 문제가 발생하였고, 1900년부터 풍수상의 문제로 능을 옮기자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이에 고종은 경기도 남양주 금곡지역을 새 능역으로 정하여 황제국의 위상에 걸맞은 능제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후 1901년에는 침전이 완성되었고, 1904년까지 주요 석물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금곡 홍릉은 고종 생전에 완성되지 못하다가, 1919년 고종 승하 후 명성황후와 합장하면서 현재 황제릉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출처:문화재청>


홍릉으로 들어가는 길.


홍릉 앞에는 인공으로 조성한 큰 연못이 있다.


능역 앞을 흐르는 바깥세상과 분리해주는 금천을 건너는 돌다리인 금천교


인공으로 조성한 금천


금천교를 지나 홍릉으로 들어가는 길


왕릉 입구임을 알려주는 홍살문


왕릉이 황제의 능으로 격상되면서 봉분지위에 있던 석물 대부분이 침전 앞으로 옮겨졌다. 석물 중 석호와 석양은 없어지고, 문.무석인,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 모양의 석상이 순서대로 세워져 있다.


문.무석인. 홍릉에는 다른 왕릉과 달리 향나무가 침전 앞에 심어져 있다.

침전
이 건물은 조선26대 고종황제의 신위를 모신 제전이다. 중국을 섬기는 제후 국가의 예에 따라 만들어진 조선 역대의 건물과는 건물의 형식과 규모가 다르다. 즉 종래의 '丁'자 모양의 정자각 대신 정면5칸, 측면 4칸의 건물을 지었으며 그 앞 양쪽에는 문관과 무관 모습의 문무석이 서 있다. 그곳부터 지붕없이 붉은 살을 박고 붉은 칠을 해서 만든 문까지는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 모양의 돌조각을 만들어 순서대로 배치하였다. <출처:문화재청>


기존 왕릉의 제사시설인 정자각 대신 홍릉에는 '-'자형으로 침전이 월대위에 세워져 있다. 침전건물은 앞면 5칸의 큰 건물로 궁궐정전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침전내에는 기존의 정자각과는 달리 정전처럼 왕이 머무는 장소인 닫집이 있다.


침전 월대에서 내려다 본 참도와 그 양쪽에 도열해 있는 석상들. 참도는 어도와 신도의 2단으로 되어 있던 기존 왕릉과는 달리 3단으로 되어 있다.


홍릉 침전


침전 옆에 세워진 비각


비각 내부에 세워진 비석


홍릉 봉분. 봉분 앞에는 온유석과 망주석, 장명등이 설치되어 있다.


기존의 왕릉은 재실이 능역입구에 설치되어 있지만, 홍릉에는 규모를 더 크게 하여 재궁을 왕릉 바로 앞에 세워 놓고 있다.


수라간과 수복방


홍릉 앞 연못 주변


순종의 능인 유릉으로 가는 길


중국 베이징 명나라 신종의 능인 정릉(딩링) , 홍릉이 중국 황제능을 따랐다고는 하지만 실제 명황제의 능 중 하나인 딩링은 휠씬 크고 웅장하며, 조성방법도 많이 다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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