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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선 유적_왕릉

여주 효종 영릉(사적195호), 17대 효종과 인선왕후의 능

younghwan 2013. 4. 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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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위치한 조선 17대 효종과 인선왕후의 능인 영릉이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를 모신 영릉에서 북동쪽으로 700여m 정도 떨어진 남한강변에 위치하고 있는 왕릉이다. 효종의 능은 원리 구리 동구릉 건원릉 서쪽편에 있던 것을 현종대인 1673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당시 석물에 틈이 있어 봉분안으로 비가 샐 염려가 있다는 여론이 있어서 능을 옮기기는 했는데, 실제로 별 문제가 없어 이에 연루된 인사들이 면직을 당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산릉의 조성과 천장 등에 관련하여 세력간 대립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왕릉은 왕과 왕비의 능이 상하로 조영되어 있는 동원상하릉으로 효종 영릉이 최초의 사례이며 이후 경종과 선의왕후의 의릉이 이런 형태를 하고 있다. 단지 왕릉을 두르는 담장인 곡장은 위쪽에 있는 왕의 능에만 있다. 또한 영릉을 다른 왕릉과는 달리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금천이 흐르며, 참도 중간에 금천교가 있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아들로 봉림대군으로 봉해졌으며, 병자호란때 청나라에 패한이후 볼모로 청나라 심양에 끌려가 8년간 머물렀다고 한다. 같이 끌려갔던 소현세자가 인조의 미움을 받아 소현세자의 맏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자로 책봉되었다. 청나라에서의 볼모생활 동안 설욕에 뜻을 두었기때문에 왕으로 즉위하자 북벌계획을 수립하고 군사를 양성하고 군비를 확충하였다. 효종대 청나라는 국가의 세력이 더욱 강대하여 그 꿈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청나라에 따라 러시아 정벌에 군대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효종은 북벌을 꿈꾸었지만 당시 지배세력은 표면상 그의 북벌을 지지할 뿐 실질적으로 현상을 유지하는 기득권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효종 사후 숙종.영조.정조가 기득권을 타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정조이후에는 세도정치하에 왕권이 추락하면서 조선은 멸망의 길로 걸었다고 할 수 있다.


세종대왕 영릉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영릉. 원래 동구릉에 있던 것을 지세가 좋지 않다는 여론으로 왕릉을 옮긴 사례로 조선후기 당쟁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영릉(효정.인선왕후), 사적 195호, 경기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영릉은 효종대왕과 인선왕후의 능이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소현세자가 돌아가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649년 조선조 제 17대 왕으로 즉위하여 1659년에 승하하니 재위 10년에 춘주가 41세였다. 효종은 병자호날 후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로 청나라 심양에서 8년간 고초를 겪었는데 당시 조선 왕조가 당한 굴욕은 씻을 수 없는 민족의 한으로 생각했다. 왕위에 오른 후 효종은 이 수치를 씻고자 청나라 정벌을 계획하여 대내적으로는 대동법을 실시하고 화폐를 널리 보급하여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대외적으로는 이를 바탕으로 북벌 계획을 추진하여 성채를 쌓고 총수병을 양성하여 국방력을 강화하였다. 이즈음 러시아가 시베리아쪽으로 남진하자 청나라는 조선에 원병을 청하였다. 이에 왕은 우리 군대의 능력을 시험하고 청나라의 군사 정세를 탐지하고자 두 차례에 걸쳐 나선정벌 원정군을 보내어 송화강, 흑룡강에서 러시아군을 크게 격판하였다. 그러나 북벌계획을 실천에 옮기기도 전에 갑자기 승하하여 그 뜻을 펴지 못하였다. 영릉은 원래 경기도 양주(현 구리시)의 건원릉 서쪽에 있었던 것을 현종 14년(1673)에 여주로 옮겨왔으며, 효종의 이 북벌웅지를 기리고자 1977년 경역을 정비하였다. <출처:문화재청>


세종대왕 영릉에서 효종 영릉으로 들어가는 길


보물 1532호로 지정된 영릉 재실. 재실은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원래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어 조선왕릉 재실 중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재실에서 영릉을 들어가는 숲길

홍살문
신성한 곳을 알리는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 홍전문.홍문이라고도 한다. 화살모양의 살대는 법도의 곧고 바름을 의미하며 나라의 위엄을 상징한다. 능역의 들머리에는 홍살문이 서 있고 제관들이 찾을 때 절을 하는 배위가 조성되어 있다. 홍살문에 도착한 제관은 배위에 절을 하고 정자각에 이르는데 홍살문과 정자각을 연결하는 돌길을 참도(참례하러 가는 길)라 하며 가운데 높은 길은 신도라 불러 돌아가신 선왕의 혼령만이 신도로 출입할 수 있을 뿐이다. <출처:문화재청>


왕릉입구임을 알려주는 홍살문.


영릉 참도. 신도와 어도로 되어 있다.


제사음식을 준비하는 수라간과 능지기들이 머무는 공간인 수복방

정자각
제례 때 제물을 진설하고 제사를 드리던 집이다. 위에서 보면 건무이 '丁'자 모양을 학 있어 정자각이라 부른다. 동쪽과 서쪽에 오르는 층계가 있는데 이는 원래 제례의식이 동입서출(동쪽으로 진입하여 서쪽으로 내려옴)로 진행됨을 의미한다. 이 건물은 1673년 영릉 천장시에 함께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문화재청>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정자각


정자각 월대를 오르는 계단


정자각 월내 내부


정자각 내부. 제사음식을 올리는 상이 준비되어 있다.


월대에서 내려다 본 참도. 효종 영릉은 자연지세에 맞추어 참도 중간에 금천이 흐로고 돌다리인 금천교를 설치해 놓고 있다.


수장자의 생애와 업적을 새긴 비석이 있는 비각.


효종 영릉은 쌍릉이지만 봉분이 상하에 배치된 동원상하릉이다. 왕의 봉분 뒷편에만 담장을 둘러 같은 능역임을 보여주고 있다. 영릉에서 처음으로 이런 봉분배치를 하였다고 한다.


뒷편 효종의 봉분


앞쪽에 위치한 인선왕후 봉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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