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story Traveling

고려 조선 유적_왕릉

남양주 홍유릉 유릉(사적207호), 조선왕조 마지막 순종의 능

younghwan 2013. 3. 16. 01:42
반응형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한 조선왕조 마지막 왕이 순종과 순명효황후 민씨, 순정효황후 윤씨를 합장한 유릉이다. 순종이 승하한 1926년에 조성된 유릉은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왕릉으로 원례는 새로 즉위한 왕이 국장을 주관하지만, 순종의 장례식은 당시 이왕직 장관이었던 민영기가 주관하였다. 기존의 왕릉과는 달리 황제의 예를 능을 조성한 홍릉과 거의 비슷하게 조성하였다. 왕릉의 석물들을 현대 조각상처럼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등 기존의 관례에서 벗어나 일제가 영향을 미친 부분이 많은 왕릉이기도 하다. 순종의 능을 조성한 이후 서울 광진구 유강원에 있던 순명효왕후를 함께 모셔 합장릉으로 조성하였다. 유릉의 조성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졌지만, 마지막으로 합장된 순정효황후가 해방 이후 1966년에 돌아가시면서 이곳에 합장되었기때문에 왕릉조성에 대한민국 정부의 손길이 미친 유일한 왕릉이라 할 수 있다.

 홍릉과 마찬가지로 유릉을 기존 왕릉과는 달리 제례시설인 정자각 대신 '-'형 침전을 세우고, 봉분 주위에 있던 문.무인석을 비롯한 석상들을 침전 앞으로 옮겼다. 석물 중 석호와 석양은 없어지고 대신 중국 등의 영향을 받아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이 문.무석인과 함께 참도 양쪽에 도열하고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참도 또한 신도,어도의 2단계였던 것이 가운데가 높은 3단형식으로 바뀌었다. 침전 월대의 계단 또한 가운데 3개, 양쪽에 2개씩 놓여 있다.

유릉, 사적207호, 남양주시 금곡동
유릉은 조선 최후의 황제인 27대 순종과 황후 순명효황후 민씨, 계후 순정효황후 윤씨의 능이다. 순종은 고종 11년(1874) 2월 28일에 고종의 둘째 아들로 창덕궁에서 태어났다. 광무 원년(1897)에 황태자가 되었고 광무11년(1907) 7월에 고종의 뒤를 이어 창덕궁에서 황제위에 올랐다. 황제위에 오른 후 연호를 융희라 정하고 기울어 가는 국운을 바로 잡으려 하였으나 재위 4년만인 1910년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후 순종은 단지 이왕으로 불렸고 1926년 4월 25일 53세로 창덕궁에서 돌아가셨다. 순명효황후 민씨는 여은부원군 민태호의 딸로 고종 19년(1882)에 세지빈이 되었고 광무 원년(1897) 황태자비로 되었으나 순종이 즉위하기 전인 광무8년(1904) 11월에 33세로 돌아가셨다. 순정효황후는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딸로 광무10년(1906) 12세의 나이로 황태자비에 책봉되었다. 그 다음해 순종이 황제위에 오르자 황후가 되었다. 1910년 일제가 국권을 빼앗으려 조약체결을 서두르자 황후가 옥새를 치마 속에 감췄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1966년 1월 13일 72세로 창덕궁 낙선재에서 돌아가셨다. <출처:문화재청>


조선왕조 마지막 왕인 순종의 능인 유릉.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왕릉으로 황제의 예에 맞추어서 조성한 능이다. 왕릉은 새로 즉위한 왕이 주관하여 조성해야 하지만, 순종은 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당시 이왕직 장관이 주관하여 일제의 영향하에서 왕릉이 조성되었다. 별도의 능역을 조성하지도 않았으며 홍릉과 거의 유사하게 조성하였다.


왕릉 입구 홍살문.


홍릉과 마찬가지로 유릉의 참도는 가운데가 높은 3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존 왕릉의 봉분 주위에 세워져 있는 석물들이 침전 앞으로 옮겨져 있다. 석양, 석호는 없어지고 문.무석인,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모양의 조각상이 참도 양쪽에 도열해 있다. 동물의 형상을 간략해서 묘사한 기존 석물과는 달리 일제는 서양식 조각수법을 반영해서 사실적으로 묘사한 조각상을 세우도록 강요했다고 한다.

침전
이 건물은 조선 제27대 순종황제의 신위를 모신 제전이다. 중국을 섬기는 제후 국가의 예에 따라 만들어진 조선 역대의 건물과는 건물의 형식과 규모가 다르다. 즉 종래의 '丁'자 모양의 정자각 대신 정면 5칸, 측면 4칸의 건물을 지었으며 그 앞 양쪽에는 문관과 무관 모습의 문무석이 서 있다. 그 곳부터 지붕없이 붉은 살을 박고 붉을 칠을 해서 만든 문까지는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 모양의 돌조각을 만들어 순서대로 배치하였다. <출처:문화재청>


제후국의 예에 따라서 제사시설로 지어진 기존 왕릉의 정자각과는 달리 왕이 머무는 숙소라는 개념의 침전이 왕릉 앞에 있다. 침전은 앞면 5칸의 큰 건물로 사당에서 주로 사용하는 맞배지붕 대신 궁궐전각처럼 팔작지붕을 사용하고 있다. 참도 또한 홍살문에서 침전까지 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정자각과는 달리 월대 전면에 3개의 계단이 있다.


월대에서 내려다 본 참도와 양쪽에 도열해 있는 석상들


유릉 침전 내부. 정자각과는 달리 왕이 머무는 닫집이 내부에 있다.

순종.순명효황후.순정효황후 유릉, 사적 207호
유릉은 조선 27대 왕이자 대한제국 2대 황제인 순종과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를 모신 능으로, 조선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세 분을 하나의 봉분에 모시고 있다. 순종(1874~1726)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아들로 1897년 대한제국 수립 후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며, 1907년 대한제국 제2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순종은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과 강제로 병합되면서 황제의 자리에 물러났으며, 1926년 창덕궁에서 돌아가셨다. 순종의 승하는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항일운동인 6.10만세 운동이 일어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순종의 첫 번째 황후인 순명효황후(1872~1904)는 1904년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기 전에 돌아가셨다. 순명효황후의 무덤은 본래 서울시 광진구 지역에 유강원으로 조성되었고, 순종 승하 후 경기도 남양주에 유릉을 새로 조성하면서 함께 모셔지게 되었다. 순종의 두 번째 황후인 순정효황후(1894~1966)는 1906년 황태자비로 책봉되고, 1907년 순종 황제 즉위화 함께 황후로 책봉되었다. 순정효황후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대한민국 정부 수립 등 굴곡 많은 한국 현대사를 겪다가 1966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돌아가셨으며, 현재 유릉의 마지막 안장자가 되었다. <출처:문화재청>


침전 옆에 세워진 비각


유릉 봉분. 순종황제와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가 하나의 봉분에 합장되어 있다. 순정효황후가 1966년에 돌아가셨기때문에 현재의 봉분은 대한민국 정부에서 조성했다고 볼 수 있다.

순종 승하와 6.10 만세운동
1926년 4월25일 순종이 창덕궁에서 돌아가시자 많은 민중이 순종의 인산일인 6월10일에 서울로 운집하였다. 그리고 순종의 발인행렬을 쫓아 학생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독립선언문을 뿌렸다. 1926년의 6.10만세운동은 1919년 3.1운동처럼 황제의 인산일을 기점으로 일어난 독립운동으로, 대한제국의 쇠망과 황제의 죽음을 슬퍼하는 민중의 모습과 조선의 주권을 되찾고자 하는 민중의 의지가 표출된 역사적 사건이다. <출처:문화재청>


홍유릉 가운데 위치한 연못, 조선의 연못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에 따라 연못은 사각형으로, 섬은 둥글게 하는 것이 보통인데, 홍유릉의 연못은 연못도 둥글고 섬도 둥글게 조성해 놓고 있다. 


능역과 바깥세상을 구분해 주는 금천과 금천교


홍유릉에는 기존 왕릉에는 없는 어정(御井)이 홍살문 왼쪾편에 있다. 


유릉 수복방. 수복방 앞에는 기존 왕릉에는 없는 향나무가 심어져 있다.


기존 왕릉에는 재실이 왕릉 능역 입구에 있으나, 홍유릉에는 재궁이라고 할 수 있는 큰 규모의 재실이 왕릉 바로 앞에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