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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관아

서산 관아문, 옛 서산군 관아 아문과 노거수

younghwan 2013. 3. 26.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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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은 충남 서해안의 진산이라 할 수 있는 가야산 서쪽편에서 태안반도 사이에  낮은 구릉지대에 위치한 고장으로 동쪽으로 당진.예산, 남쪽으로 홍성, 서쪽으로 태안군에 접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서산시에는 충청병영이 있었던 해미현과 서령군이 있었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 백제가 서쪽끝 태안반도 끝 항구를 통해 중국과 교류하던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삼남지방에서 세금으로 걷어들은 물자를 운반하던 조운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고장이다. 남쪽의 천수만, 북쪽의 아산만을 통해 바다와 쉽게 접근할 수 있었기때문에 고려말, 조선초 왜구의 위협을 많이 받았던 곳이며, 병자호란 이전까지 서해안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 해미읍성에는 충청병영이 설치되어 있었다.

 서산시청을 비롯한 서산시 주요 관청들은 도심 외곽으로 이전한 많은 시.군들과는 달리 옛 서산군 관아가 있는 지역 주변에 아직 남아 있다. 옛 서산군 관아 건물들 또한 허물지 않고 일제강점기 이후 사무소로 계속 사용해 왔던 까닭에 지금도 객사, 외동헌, 관아문 등 건물이 남아 있다. 서산군 관아 출입문은 현 서산시청 정문 옆에 있는데, 원래 위치에 그대로 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오랫동안 서산군청 출입문으로 사용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서령군문'이라 적히 관아문은 앞면 3층의 2층 문루형태를 하고 있는 건물로 전형적 아문의 형태를 하고 있다. 실제로 이 출입문은 고종대에 중건된 것으로 약150년에 만들어진 그렇게 오래된 건물은 아니다.

서산 관아문, 충남 서산시 읍내동
관아는 객관.동헌.누정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관아의 문루와 외동헌만이 남아 있다. 관아문에는 '서령군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풍악루'라고도 불리었다. 1867년(고종4)에 당시 서산군수로 있던 오병선이 건립하였다. 관아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기둥모양의 주춧돌을 배치하였으며, 아래층 내부에는 가운데 기둥에 각각 대문을 달아서 통행로로 사용하고 있다. 1959년 한 차례 수리하였으며, 1979년에 완전해 해체하여 다시 복원하였다. <출처:서산시청>


오랫동안 서산시청 출입문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옛 서산군 관아 아문. 앞면3칸의 2층 문루로 19세기에 지어진 건물이다.


문루는 화강석을 잘 다듬어 만든 장대석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워 놓고 있다. 문루 아래에 3개의 출입문이 있다.


'서령군문'이라 적힌 현판. 익공계 공포를 하고 있으며, 단청으로 화려하게 장식을 하고 있다.


안쪽에서 본 관아 아문


옛 서산군 관아 아문

읍내동 귀부석
화강암재 조각으로 서령군문의 정면 좌.우측에 2구가 놓여져 있다. 거북의 등 위에 비석을 세울 수 있는 홈이 파여져 있었던 것을 시멘트로 매운 흔적이 있는데 원래 용도는 비석의 믿받침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각 수법으로 보아 근래의 것으로 추정된다. 양쪽의 귀부석은 규모는 같으나 모양은 다르게 조각되었다. 서쪽의 귀부석은 눈.귀가 둥글게 표현되었으며, 코는 납작하면서도 입체감이 있어 얼굴표정이 해학적으로 보인다. 동쪽의 귀부석은 서쪽의 것과 대체로 비슷하지만 얼굴의 양눈썹 사이가 좁고, 눈은 옆으로 긴 타원형이다. 입은 양 끝만 또렷하게 표현되었다. 등에는 6각형 모양이 이어져 있으며, 다리는 서쪽의 귀부석 다리보다 짧다. <출처:서산시청>


비석받침돌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서산 읍내동 귀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조각수법이 빼어나지 못한 평이한 귀부이다.


관아 입구에 세워져 있던 선정비들


아문 옆에 있는 외동헌


옛 관아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서산시청


서산시청 앞 공원에 남아 있는 노거수


서산시청 앞 노거수


서산시청앞 큰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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