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도심 달성공원에 남아 있는 옛 경상감영 출입문이었던 관풍루이다. 조선시대 관찰사가 근무하던 감영 출입문으로 보통 '포정사'라고 불렀는데, 대구감영 포정사문루는 '관풍루'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다. 원래는 '폐문루'라고 불렀는데 '관찰사가 문루위에서 세속을 살핀다'는 뜻으로 '관풍루'라 이름을 지였다고 한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전형적인 관아 문루 형태를 하고 있다. 문루 안쪽에는 '영남포정사'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원래는 경상감영이 있던 대구 도심 경상감영공원에 있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도청이 들어서면서 이곳 달성공원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경상감영는 조선시대 경상도를 관할하던 관찰사가 근무하는 관아이다. 조선초기 관찰사는 임기 2년(초기1년)으로 지역을 순회하면서 근무했기때문에 특별히 감영을 설치하지 않았으나 점차로 특정지역에 머물면서 감영과 부속기관들이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경상감영은 경주, 상주 등에 위치하고 있다가 감영이 한곳에 머무르기 시작하면서 1601년(선조34)에 대구에 감영이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대구 도심에 위치한 경상감영공원은 조선시대 감영이 있던 곳으로 일제강점기에 도청이 설치되면서 감영에 속한 대부분의 건물들은 헐리고 정청이었던 선화당과 내아인 징청각만이 원래의 위치에 남아 있고, 문루였던 관풍루는 달성공원으로 옮겨졌다.
대구 관풍루, 대구시 중구 달성동
대구에 감영이 설치되면서 선화당의 남쪽에 정문이 포정문을 세우고 그 위에 문루를 만들어 관풍루라 하였다. 1906년대 구읍성이 헐리면서 지금의 달성공원 안으로 옮겼으며, 1970년에 해체 복원하였다. 당시 관풍루에는 큰북, 종, 피리, 나팔 등의 풍악기구를 준비해 놓고 매일 밤 10시에 문을 닫고, 새벽 5시에 문을 여는 풍악을 울렸다고 한다. 이 풍악소리에 맞춰 동서남북의 4개 성문을 열고 닫는 의식절차를 엄숙히 행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 누에서 30걸음쯤 남쪽에 '절도사 이하는 모두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비석'이 있어 관찰사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이면 말에서 내려 걸어오도록 했다고 한다. <출처:대구시청>
대구 도심공원인 달성공원 북쪽편 성벽 위로 옮겨진 옛 경상감영 출입문 문루인 관풍루.
관풍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전형적인 관아 출입문 형태를 하고 있다. 조선시대 관풍루에는 큰북, 종, 피리, 나팔 등의 풍악기구를 준비해 놓고 성문을 열고 닫는 시간에 풍악을 울렸다고 한다.
'관풍루'라고 적힌 현판. 보통 감영 문루는 포정사라고 부르는데, 경상감영 문루는 '이곳에 올라 풍속을 살핀다'는 뜻으로 '관풍루'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문루 안쪽에는 '영남포정사'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문루는 목조기둥으로 세우고 있으며 현재 출입문은 남아 있지 않다. 뒷편 계단을 통해 문루를 오르내리도록 되어 있다.
문루 추녀마루 잡상. 원래부터 그런지 알 수 없지만 우리나라 관청건물 중에서는 가장 많은 7개의 잡상이 올려져 있다.
공포는 익공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으며, 겹처마에 단청을 하여 화려하게 꾸며놓고 있다.
옆쪽에서 본 관풍루
조선시대 경상감영 모형. 관찰사가 근무하던 정청인 선화당을 중심으로 많은 부속건물들로 이루어졌다.
원래 경상감영이 있었던 대구 '경상감영공원'에 남아 있는 관찰사가 근무하던 정청인 선화당.
관풍루가 옮겨진 대구 달성공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곽 중 하나로 흙으로 쌓은 토축성 형태를 하고 있다. 고대국가가 성립되기 시작하던 청동기시대에 처음 쌓기시작하여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전되어 있는 성곽 중 하나이다.
관풍루에서 내려다 본 대구 달성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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