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계산동 근대골목 이상화 고택 맞은편에 있는 서상돈 고택이다. 현재의 건물은 원래의 자리에 아파트가 지어지면서 규모를 축소하여 복원한 건물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부호들이 많이 살았던 도시형 개량한옥 형태를 하고 있는 건물로 안채, 사랑채와 별채로 보이는 작은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대구 지역 부호였던 서상돈이 살았던 저택으로는 소박하면서 검소하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원래 규모에서 축소되었다고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당시의 모습이 남아 있는 주택이라고 할 수 있다.
서상돈은 서울출신으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여러차례 천주교 박해를 피해서 지방으로 옮겨다니다가 대구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대구지역에서 지물행상과 포목상을 하면서 크게 부를 축적하여 당대에 재벌수준이었다고 하며, 천주교신자로서 대구교구 설립 후 성직자들을 지원하였다고 한다. 구한말 독립협회 회원으로 활약했으며, 을사늑약 이후 외세침탈에 대응하여 전국민이 담배를 끊어 국채로 보상할 것을 제안하여 전국민운동을 주도했다고 한다.
서상돈 고택, 국채보상운동의 거장
국채보상운동은 일제로부터 국권을 찾고자 나라빚을 갚자는 모금활동으로 대구를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본 고택은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에 섰던 서상돈의 삶의 터전으로 한국 근대문화를 담고 있는 유서깊은 곳입니다. <출처:대구시청>
대구시 중구 계산동성댕 뒷편 골목길은 대구읍성내 구도심에서도 부유층이 많이 살았던 지역으로 보이며, 대구약령시를 비롯하여 역사적인 명소가 많이 남아 있어 대구 근대화골목이라 부른다. 골목입구 부근에는 저항시인 이상화가 살았던 고택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던 서상돈이 살았던 고택이 있다. 이 고택은 원래 있던 곳에 아파트가 지어지면서 아파트 뒷편에 그 규모를 축소하여 건물을 복원해 놓고 있다.
고택은 전통한옥 형태를 하고 있지 않으며, 일제강점기에 많이 지어진 도시형 개량한옥이라 할 수 있다. 안채 건물은 '-'자형으로 앞면 4칸으로 부엌과 대청마루, 안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통한옥과는 달리 대청마루 앞쪽에 유리문을 달아 놓고 있다.
사랑채는 앞면 3칸으로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이며, 대구지역에서 큰 부를 축적했던 서상돈이 생활했던 공간으로는 소박한 편이라 할 수 있다.
별채 건물
대문 안쪽에 벽돌로 담장을 쌓고 안쪽에 출입문을 두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한옥에서 볼 수 있는 건물구조라 할 수 있다.
서상돈 고택. 원래 대문 방향으로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기때문에 뒷편으로 출입하게 되어 있다.
서상돈 고택 뒷편에는 저항시인 이상화가 살았던 고택이 있다.
이곳에서 계산동성당을 지나 대구약령시까지 골목길에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부호들이 많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 골목을 대구근대골목이라 부른다.
* 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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