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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_정원

서울 비우당, 낙산 동쪽 지봉 아래 '지봉유설'을 지은 실학자 이수광이 살았던 집터

younghwan 2013. 9. 30.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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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양도성을 이루고 있는 동.서.남.북 봉우리 중 가장 낮은 서쪽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 동쪽 상산 줄기인 지봉 아래에 복원되어 있는 비우당이다. 이곳은 조선중기 실학자로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지봉유설'을 저술한 지봉 이수광이 살았던 집터이다. 부엌 1칸, 방2칸으로 이루어진 조선시대 전형적인 서민가옥 형태를 하고 있는 이 집은 조선시대 한양에 거주했던 선비들이 소박하게 살았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원래 이수광의 외가쪽 인물로 청백리로 널리 알려졌던 유관이 살았던 집을 이수광이 고쳐지어 살았다고 전해지는 집이다. 현재의 가옥은 최근에 옛모습을 복원한 것으로 실제 초가집과는 약간 다른 모습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규모나 형태에서 이수광이 살았던 모습을 느껴볼 수 있다, 가옥 뒷편에는 단종비 정순왕후가 폐위된 뒤 빨래를 했던 곳으로 전해지는 자주동샘과 거북모양의 바위가 남아 있다.

비우당, 서울 종로구 창신동
비우당은 '비를 가리는 집'이라는 뜻으로, 조선시대 실학자인 지봉 이수광(1563~1628)이 살던 곳이다. 낙산 동쪽 상산의 한 줄기인 지봉 아래 있었는데 이수광의 호 지봉이 여기에서 나왔다. 원래는 창신동 쌍용2차 아파트 자리에 있었는데 서울시에서 낙산공원을 조성하면서 이곳에 복원하였다. 조선 초기의 청백리로 명성이 높은 유관이 이곳에서 살았는데 지붕이 새자 손수 우산을 받치고 살면서 부인에게 "우산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딜꼬?"라 농담을 하였다는 '유재상의 우산'이라는 고사가 생겼다. 이곳은 외손인 이수광 집안으로 상속되었는데, 그 집이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이수광이 집을 새로 짓고 그 이름을 비우당이라 하였다. '동원비우당기'에 이러한 사연을 자세히 적었다. 이수광은 비우당에 살면서 이 일대의 여덟곳을 '비우당 팔경'이라 하고 시를 읊었다. 동지세류에서 흥인문 바깥의 못가에 핀 버들이 봄바람에 버들개지를 날리고 꾀꼬리가 지저귀는 모습을 노래하였으며, 북령소송에서는 북악의 산마루가 낮에도 늘 어둑한데 푸른 솔 그림자가 집에 드리운 것을 보고 동량으로 쓰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였고, 타락청운에서는 아침마다 누운 채 낙산의 구름을 마주하면서 한가한 구름처럼 살고 싶다고 하였다. 아차모우에서는 아차산에서부터 벌판을 지나 불어오는 저녁비를 노래하였다. 전계세족에서는 비가오고 나면 개울에 나가 발을 씻고 개울가 바위에 드러눕는다고 하였고, 후포채지에서는 지봉과 상산의 이름에 맞추어 상산사호처럼 살고 싶다 하였다. 암동심화에서는 복사꽃 핀 꼴짜기에서 나비를 따라 꽃을 찾아가는 풍류를 말하였고, 신정대월에서는 맑은 정자에 올라 술잔을 잡는 흥취를 말하였다. 비우당이 있던 곳은 조선시대 자지동이라 불렀다.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가 폐위되어 영월로 간 단종을 기다리면서 이곳에 와서 빨래를 하였는데 빨래가 붉은 빛으로 염색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 위쪽에 거북바위가 있었다. 정순왕후가 단종이 탄 거북이를 타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는데 아침에 보니 이 바위가 나타났다는 전설도 전한다. <출처:서울시청>


조선중기 실학자 이수광이 살았던 집터 부근에 복원해 놓은 옛 가옥. 부엌 1칸, 방 2칸으로 이루어진 소박한 도시주택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비우당 툇마루


지봉 이수광이 살았던 비우당 옛터임을 알려주는 표지석


마당 뒷편에 남아 있는 자주동샘, 단종비 송씨가 비단을 빨면 자주색 물감이 들었다는 슬픈 전설이 어려 있는 샘이다.


자주동샘 내부


자주동샘 뒷편에 남아 있는 거북바위. 단종비 정순왕후가 꿈에 단종이 거북을 타고 승천하였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이다.


지봉 이수광이 살았던 집터에 복원한 옛 초가집인 비우당


비우당 내려가는 길


비우당 입구. 낙산 정상까지 도로가 이어져 있다.


비우당에서 낙산으로 연결되는 도로


도로는 서울성곽이 있는 낙산 정상까지 이어진다.


낙산 능선을 따라 쌓은 서울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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