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성계곡은 문수봉에서 발원하여 북한산 서쪽으로 흘러내려오는 약 6 km에 이르는 큰 계곡으로 북한산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북한산성계곡을 따라서 이어지는 등산로는 북한산 주봉인 백운대와 함께 이곳을 찾는 등산객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코스로 북한산에 산재한 대부분의 봉우리들과 연결되는 큰 길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숙종대 한양의 취약한 방어력을 보완하기 위해 쌓은 북한산성을 이 계곡을 둘러싸고 있는 봉우리와 능선을 연결한 거대한 산성이며, 계곡 주변에는 비상시 국왕이 머물 수 있는 행궁을 비롯하여 산성을 지키는 군사들이나 관료들이 머물고, 식량 등을 저장하는 관아 건물, 북한산성을 지키고 성곽을 수리하기 위해 동원된 승병들을 위한 많은 사찰들이 계곡 주변에 산재해 있다.
북한산성은 사방으로 여러 성문과 암문을 두고 있지만, 주출입문은 계곡이 시작되는 지점에 위치한 대서문이다. 북한산성 계곡 입구 대서문 안쪽에는 주민들이 거주했던 산성마을이 있었고 등산객들이 하산하면서 막걸리 한잔을 하던 크고 작은 음식점들이 많았었는데 최근에 국립공원을 정비하면서 산성아래로 이주하고 지금은 국립공원내에는 사찰 외에는 민가가 없다고 한다. 북한산성입구에서 산성마을을 지나면 북한산 탐방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등운각 갈림길이 나타난다. 계곡 입구에 해당되는 이곳에서는 북동쪽으로 북한산 주봉이라 할 수 있는 백운대를 비롯하여, 만경대, 염초봉, 노적봉, 원효봉 등의 크고 작은 바위봉우리를 살펴볼 수 있다. 등청각에서 백운대로 향하는 갈림길을 지나면 계곡을 따라서 걷기에 평이한 등산로가 이어지며, 중간에 방어상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세운 중성문을 볼 수 있다. 중성문을 지나 조금 걸어 오르면 북한산성내 중심지로 승병들이 머물렀던 큰 사찰터인 중흥사 절터와 원증국사 승탑과 탑비가 남아 있는 태고사, 국왕이 피신할 수 있는 행궁과 북한산성계곡을 찾았던 많은 명사들이 풍류를 즐겼던 산영루터를 살펴볼 수 있다. 행궁주변은 북한산성내 중심이 되는 지역으로 이곳에서 북한산에 위치한 대부분의 봉우리와 연결되는 등산로들이 갈라진다.
북한산성 대서문 아래 산성마을에서 출발하여 실제로 북한산 등산이 시작되는 등운각 갈림길이다. 2000년대 후반까지 마을이 있었으며, 등산 후 많은 등산객들이 막걸리를 즐겼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넓직한 공터에 크고 작은 벤치들이 들어서 있고, 북한산성의 내력을 설명해 주는 역사관이 들어서 있다. 이곳 전망대에서 백운대를 비롯하여 북한산으 크고 작은 봉우리들을 살펴볼 수 있다.
등운각 갈림길에서 북쪽계곡을 따라서 북한산 최고봉인 백운대로 올라갈 수 있다. 하얀색의 화강암 바위산 봉우리들인 원효봉, 염초봉,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이 나란히 보인다.
등산로 입구 계곡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원효봉. 북한산 원효봉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높이는 해발 505m이며,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에 속한다. 명칭은 봉우리 아래에 있는 원효암에서 유래한 것으로, 원효암은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수도하였던 토굴이다.
염초봉과 백운대, 만경대, 염초봉의 본래 이름은 영취봉이며, 높이는 해발 662m이다. 북한산의 원효봉에서 백운대로 이어지는 원효봉 능선에 있는 암봉으로 행정구역상으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에 속한다. 백운대(836.5m)는 북한산의 최고봉으로 화강암의 험한 암벽을 노출하고 있다. 산마루에서 바라보는 기암절벽의 조망이 일품이다. 만경대(799.5m)는 만수봉이라고도 한다. 북쪽의 인수봉, 백운대와 만경대를 합쳐서 삼각산이라고도 한다. 백운대나 인수봉과 같이 단일 암봉이 아닌 여러 모양의 암봉들이 남북으로 늘어져 보는 방향에 따라 각가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에 만가지의 경치를 볼 수 있다하여 만경대란 이름이 붙어졌다.
북한산성 입구 산성마을에서 등운각 갈림길까지는 계곡탐방길을 통해서 올라 올 수 있다.
등운각 갈림길 주변에는 크고 작은 음식점들이 들어서 있던 마을이었으며, 이곳까지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가 있다. 이 길은 원래 북한산성을 건설하면서 서쪽편 주출입문인 대서문을 통해 산성내부로 들어오는 공식적인 도로였다고 할 수 있다.
이곳에 마을이 있던 시기에 지어진 곳으로 보이는 70년대풍의 다리인 '새마을교'. 다리를 건너 왼쪽길로 올라가면 북한산 정상인 백운대를 오르는 길이며, 오른쪽길은 북한산성 계곡을 통해 태고사, 북한산성행궁을 지나서 산성 내부로 들어서는 길이다.
옛 산성마을이 있었던 자리는 넓은 공터가 있는 공원으로 바뀌었다. 2000년대 후반까지 이곳에는 크고 작은 음식점들이 들어서 있었으며, 많은 등산객들로 흥청망청하던 장소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북한산성계곡 등산로 입구에 세워져 있는 조선시대 국왕 복장을 하고 있는 석상
북한산 계곡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인 북한산성 계곡을 따라서 이어지는 등산로
계곡을 따라서 이어지는 등산로는 걷기에 평이한 편이며 수량이 풍부한 계곡물이 흘러내려 항상 시원한 느낌을 주는 계곡이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이 주를 이르는 북한산답게 계곡에도 크고 작은 바위들이 빼어난 경치를 만들어내고 있다.
북한산성 중성문. 북한산성은 험준한 산과 계곡을 막아 조성한 산성으로 적의 침입을 막기에 용이하는 주출입문인 서쪽방향으로는 경사가 완만하여 상대적으로 방어에 취약한 지점이었기때문에 대서문 안쪽 행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성벽을 쌓고 중성문을 두고 있다.
중성문 문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북한산성계곡 등산로
북한산 노적봉, 봉우리의 모양의 노적가리를 쌓아놓은 모습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임진왜란 당시 군량미가 떨어져 고심하던 중 이 봉우리에 가마니를 덮어 군량미인 것처럼 속여 위기를 넘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북한산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북한산성 성벽
중성문 안쪽으로 이어지는 북한산성계곡 등산로
북한산성 계곡을 막아서 세운 중성문과 주변 계곡
중성문을 지나면 계곡을 건너는 작은 다리를 만나고 노적봉 등산로와 연결되는 갈림길이 나타난다.
계곡의 크고 작은 바위에 앉아 잠시 쉬어가는 등산객들
계곡을 따라서 계속 이어지는 등산로
계곡을 따라서 이어지는 등산로는 북한산 등산로 중에서도 가장 편한 길이 아닌가 생각된다.
북한산성계곡
부암동 암문으로 연결되는 갈림길
북한산성계곡
북한산성내 관아인 행궁과 승병들이 거처했던 중흥사 절터 입구
북한산성 선정비군,
이곳의 비석들은 북한산성 관리의 최고 책임자가 재임할 당시의 선정과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선정비로, 현재 26기 정도 남아 있다. 비석을 세워 비문을 기록한 선정비가 대부분이며, 따로 비석을 세우지 않고 암벽에 비문을 새긴 선정비도 있다. 이들 선정비의 건립시기는 모두 19세기인데, 이 시기 북한산성의 관리는 총융청과 무위소가 맡고 있었다. 이에 비문에는 해당 관청의 관리책임자였던 총융사와 무위소 제조, 경리사의 선정을 기록하고 있다. <출처:서울시청>
입구에는 북한산성을 지키던 군사들을 관리했던 관리들의 선정비들이 세워져 있다. 주로 19세기에 이곳을 거처간 관리들의 공덕비라고 할 수 있다.
북한승도절목
이 암각문은 1855년(철종6)에 새긴 북한승도절목으로 모두 325자이다. 명문에는 승병대장인 총섭을 임명할 때 예상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한 규칙 3가지를 제시해 놓았다. 이를 통해 승영사찰이 피폐하여 승도가 흩어지고 있었던 사실과 그 원인이 총섭의 부적절한 임명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때를 전후하여 산성 밖의 승려가 총섭에 임용되기 시작한 것과, 불공평한 임용을 막기 위하여 다수결의 비밀투표를 요구했던 사실도 파악할 수 있다. <출처:서울시청>
북한산성 선정비군이 있는 바위에 새겨진 암각문이다. 철종대에 새겨진 승도절목으로 북한산성 승병 총책임자인 총섭을 선임할 때 지켜야할 3가지 규칙을 적은 글 325자가 새겨져 있다.
산영루지
산영루는 북한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경 중 한 곳에 자리잡은 누각이었다. 이 산영루에 올라 바라보는 계곡 풍경이 그윽하고 풍취 깊어 많은 선비와 문인이 이곳을 찾았다. 산 그림자가 수면에 비치는 곳이라 하여 산영루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누각의 형태는 세검정과 비슷한 凸자 형태였는데, 지금은 누각건물을 떠받치던 긴 주춧돌만 남아 산영루의 존재를 전해줄 뿐이다. 산영루가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 중기의 문인인 이정구가 1603년(선조36)에 지금의 북한산성 지역을 유람한 뒤 남긴 '유삼각산기'에 '산영루 옛터로 내려왔다'라고 적고 있어, 북한산성이 축성되기 이전에 이미 지금의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허목, 이익, 이덕무, 이옥, 정약용, 김정희 등이 산영루를 찾아 풍류를 즐겼으며, 산영루와 주변 풍관을 시와 산문으로 남겼다. 조선 후기에 시회의 장소로도 이용됐다. <출처: 서울시청>
북한산성 계곡에서 제일 경치가 좋은 곳에 세워졌던 '산영루'라는 누각이 있던 자리이다. 일제강점기때 홍수로 누각이 떠내라간 이후 복원되지 않고누각을 받치고 있던 초석들만 남아 있다. 이 누각은 북한산성을 쌓기 이전부터 중흥사 아래 경치좋은 명소로 많은 명사들이 다녀갔던 유서깊은 곳이다.
사진과 그림으로 남아 있는 북한산 산영루의 옛 모습
산영루 아래 넓은 바위 위로 흐르는 북산산 계곡
산영루 맞은편 바위에 새겨진 글씨
산영루를 지나 북한산성내 중심지역으로 중흥사가 있었던 절터로 올라가는 등산로
절터 입구 아래로 흐르는 계곡
북한산성 절터 입구에 있는 작은 샘
북한산성내 승병들을 지휘하던 승병대장인 총섭과 승병들이 머물던 큰 절인 중흥사 절터. 일제강점기때 홍수로 떠내려간 이후 최근에 조금씩 복원되고 있다.중흥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고려말 공민왕의 왕사였던 원증국사가 머물때 크게 중수하면서 사찰로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중흥사 절터를 지나 북한산성 행궁터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북한산성 동쪽편 용암문과 대동문으로 연결되는 등산로가 이곳에서 갈라진다.
태고사는 중흥사에 속한 작은 암자로 원증국사가 수행하기 위해 창건한 사찰이다. 이곳에 원증국사 승탑과 탑비가 세워져 있다. 사찰건물은 한국전쟁 당시 대부분 불타버린 것을 중수한 것이라 한다.
태고사를 지나 대동문으로 연결되는 등산로 옆으로 흐르는 계곡
등산로에서 북한산성 행궁터로 올라가는 갈림길 입구
북한산성 행궁터로 올라가는 등산로
북한산성 행궁터. 일제강점기때 큰 홍수로 건물들은 떠 내려가고 주춧돌을 비롯한 석재들만 일부 남아 있다. 행궁은 조선시대 왕이 임시로 머무는 별궁으로 역대 국왕 중 이곳 행궁에서 머문 왕은 없지만 정전을 비롯하여 총 124칸의 건물과 경리청을 비롯한 관아 건물들이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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