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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선 유적_왕릉

진주성 의기사와 의암바위, 논개 영정을 모신 사당과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바위

younghwan 2013. 7. 19.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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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성은 남해안 지역에서 섬진강을 따라서 남원을 거쳐 호남평야와 연결되는 교통로를 막고 있는 국방상 중요한 요지이다. 이곳 진주성에서는 임진왜란 중 왜군과 2차례의 큰 전투가 있었는데 첫번째는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였던 진주대첩으로 호남지방으로 진격하려는 2만여명의 왜군을 진주목사 김시민을 중심으로 3,800여명의 관군이 치열한 공방전 끝에 물리친 전투였으며, 2번째는 정유재란때 3만여명의 대병력으로 공세를 펼친 왜군에 맞서 3천여명의 조선군이 공방을 벌려 끝내 진주성이 함락된 전투가 있었다. 특히 정유재란때 왜군의 대공세로 펼쳐진 2차 진주성 싸움에서는 의병장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를 비롯하여 많은 관민들이 왜군의 공세에 거세게 저항했으나, 결국 진주성은 함락되었고 수만명의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의 전투 중에서 남원성전투와 함께 가장 격렬했던 전투 중 하나로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왜군에게도 막대한 손상을 입힌 전투였다.

 진주성 싸움에서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장군과 함께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인 논개는 2차 진주성싸움 후 잔치를 벌리던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인물이다. 실제 논개에 대한 이야기는 광해군대에 저술된 <어우야감>에 간단히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논개는 당시 전투에서 순국한 경상우병사 최경희의 첩으로 전북 장수 출신이라하며, 후대에 그를 추모하여 진주성내에 '의기사'라 사당을 세우고 그가 빠졌다는 의암바위에 사적비를 세웠다고 한다. 논개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의기사'는 촉서루 옆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촉석루 아래 작은 출입문을 지나서 내려가면 논개가 빠진 바위인 의암과 사적비가 자리잡고 있다.

진주 의기사
의기사는 임진왜란 당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영정과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논개는 진주성이 함락되자 성민과 나라의 원한을 갚기 위하여 왜장을 촉석루 아래 의암으로 유인한 후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 의기사는 그 의로운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영조 16년(1740)에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창건한 이래 두차례에 걸쳐 중건하였으며, 지금의 건물은 1956년 의기창열회가 시민의 성금을 모아 중건한 것이다. 건물구조는 정면3칸, 측면2칸, 맞배지붕의 기와집이다. <출처:진주시청>


진주성 촉석루 옆에 세워진 논개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의기사.


의기사 출입문 사이로 보이는 논개 영정


사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작은 건물이다. 의기사는 영조대에 처음 세워졌으며 여러차례 중수를 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사당은 해방 이후인 1956년에 중수한 것이라 한다.


논개사당에 걸린 글


논개 사당에 모셔진 영정. 원래 김은호 화백이 그린 영정이 있었으나, 2000년대 그의 친일행적과 일본식 화풍이 논란이 되어 충남대 윤여환교수가 그린 표준영정으로 교체되었다고 한다.


촉석루 아래 의암바위가 있는 남강변으로 내려가는 통로


촉석루 아래 작은 출입문을 통해 의암바위로 내려갈 수 있다.


촉석루 아래 의암바위로 내려가는 길. 의암바위 앞에 논개의 행적을 기리는 의암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의암바위로 내려가는 길

의암사적비
의암사적비는 선조26년(1593) 6월29일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어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왜장을 끌어 안고 순국한 의기논개의 사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어우야담'에 의해 논개의 순국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진주의 사민들은 정식이 지은 비문으로 비를 세웠고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비각을 세워 '의기논개지문'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출처:진주시청>


의암사적비.


진주우병사 남덕하가 비각을 세우면서 '의기논개지문'이라 적은 현판


의암사적비

의암
의암은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바위다. 조선 선조26년(1593) 6월29일 임진왜란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민.관.군이 순절하자 논개는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의암으로 유인하여 이 바위에서 순국하였다. 이에 논개의 순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영남사람들은 이 바위를 의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인조7년(1629) 진주의 선비 정대륭은 바위의 서쪽 벽면에는 전서체로 의암이라는 글을 새겼고 남쪽 벽면에는 한몽삼이 쓴 것으로 전하는 해서체로 된 의암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의암의 바닥 넓이는 3.5m x 3.3m 이다. <출처:진주시청>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의암바위


의암바위에서 올려다 본 촉석루


촉석루 동쪽편 진주성 성벽


촉석루 서쪽편 진주성


촉석루 앞을 흐르는 진주 남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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