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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관아

안산 안산객사, 옛 안산읍성에 남아 있는 안산군 관아 건물

younghwan 2013. 9. 2.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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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산군은 경기도 안산시 일대에 있었던 조선시대 행정구역으로 읍치는 안산시 상록구 수암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고을의 규모는 크지 않은 규모로 종3품 군수가 고을 수령이었다. 안산은 서해안 시화호 일대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수리산 서쪽 수암동에 읍성과 관아터가 남아 있다. 안산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기때문에 해안에는 조선중기까지 초지진이 설치되었으며, 서해안 방어와 연안항로의 중요한 요지였다. 안산군은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에 폐지되고 수원시.시흥군 등에 편입되었다가 1970년대 안산에 신도시가 건설되면서 안산시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산읍성이 있었던 안산시 수암동 일대에는 안산군 관아가 있었는데 옛 관아건물들은 대부분 허물어지고 지금은 최근에 복원된 객사건물만이 남아 있다. 복원된 안산객사는 앞면 9칸, 옆면 3칸 규모로 전형적인 조선시대 객사 건물 형태를 하고 있다.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가운데 3칸은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는 정청이고 양쪽에 앞면 3칸 규모의 좌.우익랑이 배치되어 있다. 익랑은 각각 온돌방 1칸, 대청마루 2칸으로 이루어졌다. 좌.우익랑은 조성에서 파견된 관리나 사신 등이 머무는 숙소로 사용되는 공간이다. 이곳 안산객사는 정조가 사도세자 능을 참배하기 위해 머문적이 있어 안산행궁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안산객사
객사는 정청에 전패(임금을 상징하는 나무패)를 모셔 국왕의 친정을 상징할 뿐 아니라 지방관이 국왕에 충성을 다짐하는 곳이었다. 고을의 수령이 집무를 보는 동헌보다 오히려 격이 높아 관아시설 중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했다. 배치는 고을의 진산을 등친 채 남향을 취하여 전망이 가장 좋은 곳에 자리 잡았고, 관아 내 독립적인 영역을 차지하였다. 객사는 한말까지 기능이 유지되었으나, 일제에 강점되면서 궐패 봉안이 중지되고 그 기증도 중지되었다. 객사의 정청은 맞배지붕으로 좌우익사보다 한단 높게 조성되었고, 좌우익사는 팔작지붕으로 온돌과 마루를 놓았으며, 정편 3칸, 측면3칸으로 축조되었다. 이곳은 1797년(정조21) 8월16일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기 위하여 하룻밤 묵어간 적이 있어 '안산행궁'이라 불리기도 한다. <출처:안산시청>


안산시 수암동 안산읍성 관아터에 복원된 안산객사. 앞면 3칸의 정청과 좌.우익랑을 두고 있는 전형적인 객사의 형태를 하고 있다.


국왕의 전패(또는 궐패)를 모시는 정청.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수리산'을 뜻하는 '鹫岩之館취암지관'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서해안 바닷가와 가까워서 수리산에는 독수리가 많이 서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산객사 좌익랑. 앞면3칸, 옆면 3칸으로 되어 있으며 작은 온돌방과 넓은 대청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좌익랑은 서반(무신)들이 주로 사용하는 공간이다.


좌익랑 대청마루. 파견된 관리들을 위한 연회가 열리는 공간이다.


안산객사 우익랑. 주로 동반(문신)들이 머무는 공간이다. 좌익랑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안산객사


객사 앞 마당에 남아 있는 수령 수백년된 느티나무


안산객사 전경


뒷편에서 본 안산객사. 온돌방 뒷쪽에 굴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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