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상주시 북천 임진왜란 유적지에 남아 있는 상산관은 조선시대 상주목 관아의 건물의 중심이 되는 객사 건물이다. 객사는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시고 예를 올리는 장소이자,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나 외국 사신이 머무는 숙소로 사용되는 건물이다. 상주 상산관은 전주객사와 함께 조선시대 객사 건물 중 최대규모를 자랑하는 건물로 궐패를 모신 정청이 앞면 3칸, 숙소로 사용되는 동익헌이 7칸, 서익헌이 4칸 규모이다. 고려시대 지방 통치체제가 정비되면서 처음 세워졌던 것으로 여러 차례 화재로 중수를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객사를 비롯한 관아 건물들은 도심내 상주경찰사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낙동강 중류에 위치한 상주시는 경주와 함께 경상도의 어원이 되는 고장으로 낙동강을 이용한 내륙수운, 백두대간을 연결해주는 문경새재, 충북 보은은 연결하는 내륙교통로 등 교통.물류의 중심지로, 주변의 넓은 평야에서 산출되는 생산을 함께 갖춘 고장으로 삼국시대 이전부터 크게 번창했다. 삼국시대 이전 이지역에는 사벌국이 있었으며 3세기 후반 신라에 복속되었다고 한다. 상주는 보은.청주 등관 연결되는 길, 문경새재를 넘어 충주로 연결되는 길을 통해 신라가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는 거점이 되었던 곳으로 역사이래로 영남내륙과 한반도 중심부를 연결하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방이었다. 후삼국시대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이 지방 출신이며, 고려초 처음 상주라는 이름이 사용된 이후 고려가 983년(성종2) 전국 주요 지방에 12목을 설치할 때 상주목이 되었다. 조선시대 상주는 경주와 함께 영남지역에서 가장 큰 고을로 태종대에는 경상감영이 이곳에 설치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였던 상주는 구한말 경부선 철도가 부설됨에 따라 주요 교통로에서 소외되어 농업중심의 지방소도시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주 상산관, 경북 상주시 경상대로
객사는 지방 관아의 중심 건물로서 고을 수령이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망궐례를 행하였으며,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머물렀던 시설이다. 이 건물은 1328년(충숙왕15) 목사 김영후가 중수했다는 '상산지' 기록으로 보아 이보다 앞서 창건된 것으로 여겨지는 객사이다. 1526년(중종21) 소실된 것을 목사 윤탕이 중건하였으나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6년(선조39) 재건하고, 1666년(현종7)에 다시 중건하였다. 근대에는 현 상주 경찰서 자리에 있었으나 1940년 상주여자중학교에 옮겨와서 교실로 사용하다가 1991년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출처:상주시청>
상주 북천전적지로 옮겨진 옛 상주목 관아의 객사인 상산관. 전주객사와 함께 현존하는 객사 중 가장 큰 건물 중 하나이다. 앞면 3칸의 정청을 중심으로 앞면 4칸의 서익헌, 7칸의 동익헌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시고 있는 정청.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상주목사가 국왕에게 예를 올리는 공간이다.
상산관 현판
망궐례
이곳 상산관은 조선시대 상주목의 객사로 궁중에서 신하가 임금에게 하례를 행하듯 이 곳 전청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두고 대궐을 향하여 임금의 만수무강을 빌고 절하던 의식을 행하던 곳으로 배례의식은 목사가 부임할 때와 나라에 즐거운 일이 있을 때, 그리고 매월 초하루 보름에 정기적으로 행하여져 왔다. <출처:상주시청>
국왕의 궐패를 모시고 망궐례가 행해지던 객사 정청 내부
상산관 서익헌. 앞면 4칸 옆면 3칸 규모로 주로 서반(무신)들이 머무는 숙소라 할 수 있다. 3칸 온돌방과 넓은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상산관 서익헌 대청마루
상산관 서익헌. 앞면 7칸의 대형 건물이다. 주로 동반(문신)들이 머무는 숙소로 오른편에 4칸 규모의 넓은 대청마루가 있으며, 상주목사가 손님을 접대하는 연회가 열렸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상산관 동익헌 대청마루
동익헌 대청마루 천정. 서까래와 보가 노출된 연등천정이다.
대청마루 천정에 걸리 객사상량문.
『상주객사 상량문』, 조정융(1666년)
1666년 전임군수인 조정융이 옛터에 복원하는 상산관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상량문으로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예전의 자리로 옮겨 처음과 같이 하였으니 오늘을 축하하고 위치가 처음으로 돌아오니 바라봄에 더욱 넓어진 것 같다. 상주는 남쪽의 이름난 지방으로서 살기 좋은 곳이었다. 그동안 객사가 옛터에 있지 않아 답답하였으나, 명문의 자손인 목사(이송령)가 부임하여 공과 사를 구분하고 어그러짐이 없이 규범을 따라 일을 하여 백성이 합심하여 공사를 순조롭게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집의 규모는 예전보다 더 크고 웅장하고 화려함이 건물의 용도와 맞으니 모든 사람들의 바램에 답하고, 대도호부의 위엄에 손색이 없다. 엎드려 비옵나니 상량이후에는 땅이 더욱 신령스러워지고 사람들은 복을 많이 받게 하시고, 우리 지역이 더욱 융숭하게 되어 임금님의 마음을 편하게 하소서" <출처:상주시청>
『객관기』, 1343년(고려 충혜왕4)에 상주목사로 부임한 근재 안축이 상산관을 보고 지은 기원문이다.
『상산관 높은 추녀 아래서』, 고려시대 문장기인 이규보(1168~1241)가 지은 글이다.
『상죽객사의 판상운 따라..』, 고려말.조선초 문신인 조준(1346~1405)이 지은 글이다.
옆쪽에서 본 상주 상산관
뒷쪽 언덕에서 내려다 본 상주 상산관
원래 상주객사가 있었던 도심에 위치한 상주경찰서. 주변에 관아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지금도 주요 관공서들이 이곳에 밀집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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