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은 조선후기 경상우병영이 주둔하던 곳으로 공북문 안쪽 언덕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근무하던 공간인 운주헌을 비롯하여 관덕당, 공진당 등 관아 건물과 무기고, 화약고 등이 있었다. 옛 관아건물들은 구한말 병영이 폐지되고 전국이 13도로 개편될 때 경상남도 감영이 설치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도청이 부산으로 옮기기 전까지 자연스럽게 이곳에 도청이 설치되면서 옛 관아건물들은 허물어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옛 관아 건물터에 인근에 있던 청계서원과 사당이 옮겨져 들어서 있고 옛 관아건물로는 병영과 감영 문루였던 영남포정사가 남아 있고, 공식적인 누각이자 남장대였던 촉석루와 관아 누각으로 사용되었던 북장대가 남아 있다.
조선시대 병영은 국방상 주요한 요지에 설치된 군사조직으로 관찰사 또는 지방관인 목사가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전국에는 총 15명의 병마절도사가 있었는데 그 중 충청도.경상좌우도.전라도.평안도.함경남북도에 전임 절도사가 임병되었다고 한다. 병마절도사는 평시에는 지방군의 훈련과 무기제작, 성곽의 수축 등 전반적인 군사활동을 담당하였으며, 전시에는 관할 지역 군사를 총지휘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진주성에 있던 경상우병영는 원래 창원 합포에 있었는데 임진왜란때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지형적으로도 적을 막기에 적합하지 못했기때문에 진주대첩 등으로 왜군을 적절히 대응했던 진주성으로 선조 35년에 이덕형 등의 건의로 옮겼다고 한다. 원래 병마절도사는 그 지역을 관할하던 지방관의 역할을 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문관이 고을을 다스리게 해달라는 지역민심에 따라 진주에는 진주목사를 별도로 두었다고 한다.
영남포정사, 경남 진주시 남성동
영나모정사는 조선조말 경상남도관찰사와 선화당 관문으로 일명 망미루라고도 불렀다. 처음 창건은 조선조 광해군 10년(1618) 병사 남이홍이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집무청으로 관덕당 대동문으로 건립한 이래 경상도우병영의 관문으로 활용되었다. 고종 32년(1895) 8도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계로 개편함에 따라 이곳에는 진주부가 설치되어 진주관찰부의 선화당 관문이 되었다. 다음해인 건양원년(1896)에 다시 전국을 13도로 개편함에 따라 경상남도가 설영되어 경상도관찰사의 선화당 관문이 된 이래 1925년 도청이 부산부로 옮겨 갈때까지 그 문루로서 영남포정사라 이름하였다. 이 건물을 본따 영남포정사가 창원시 용지공원에 세우져 있다. <출처:진주시청>
옛 경상우병영 관아 건물 중 유일하게 남아 문루이 영남포정사. 원래 병영 문루였던 것을 구한말 경상남.북도로 분리되면서 감영 아문이 되면서 '영남포정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문루 입구에 세워진 하마비. 하마비는 수령이하 모두 말에서 내려 들어가라는 표석이다. 조선조 선조37년(1604) 이래로 경상도우병영, 고종 32년(1895)에는 진주관출부, 건양원년(1896) 이래로는 경상남도관찰부가 있던 곳으로 우병영의 정문인 망미루, 관찰부의 정문인 영남포정사 입구에 세워진 것이다. 병사 및 관찰사 이외의 모든 사람은 모두 말에서 내려 가라는 뜻이다. <출처:진주시청>
영남포정사 문루
영남포정사 문루에서 관아가 있던 곳으로 들어가는 길. 보도블럭을 깔아놓아서 옛 관아의 모습 대신 공원처럼 바뀌었다.
운주헌터
운주는 군막 속에서 전략을 세운다는 뜻으로, 운주헌은 조선시대 통제사와 병사의 집무실 명칭이다. 이곳에는 경상우병영의 수장인 경상우도병마절도사의 집무실이 있었던 곳이다. 경상우병영은 원래 창원의 합포에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분탕되면서 1630년(선조36) 체찰사 이덕형의 청에 의해 진주성으로 이전했다. 경상우병영이 진주성에 설치되자 종2품 무관인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진주목사를 겸임하게 되었다. 초대 경상우도병마절도산인 이수일이 진주목사를 겸임하고 있었는데, "진주에 군인이 와서 고을을 다스리게 되니 인재가 나오지 않고 풍습이 잘 교화되지 못한다."는 주장이 나와 1635년(인조13년)에 병마절도사가 목사를 겸직하는 조치를 폐지하였다. 병사와 목사가 분리된 후에도 우병영은 진주성내에 있으면서 경상우도 병무 중심지와 영남서부의 방어기지로서 조선말까지 존속했다. 우병영에는 병사의 집무관아인 운주헌 외에 관덕당, 공진당이 있었고 주변에는 군기고, 화약고가 있었다. 1894년 7월15일 각도의 병영 혁파와 함께 폐지되었다. 1896년 지방제도 개혁으로 경상도가 남북으로 분리되었을 때, 관찰사 집무처인 선화당으로 바뀌어 경상남도 청사로 사용되었다. <출처:진주시청>
경상우병영 관아는 구한말 이후 경남 감영과 도청이 설치되면서 건물들은 대부분 허물어지고 옛 터만 남아 있다. 경남도청 이전 이후 진주성이 사적지로 바뀌면서 관아가 있던 자리에는 인근에 있던 청천익을 모신 청계서원과 진주지역 유력 성씨인 진주 하씨의 조상인 고려대 장군 하공진으로 모신 사당인 경절사가 옮겨져 있다.
경상우병영 관아가 있던 자리
진주박물관에 전시된 옛 진주성 모형
관아 건물터 뒷편에는 군사를 지휘하던 북장대가 있다. 누각 형태로 지어진 이곳 장대는 병마절도사가 손님을 접대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북장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영남포정사 문루
진주성비석군. 조선조 선조37년(1604) 합포(마산)에 있던 경상도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긴 병사 겸 목사 이수일의 유애비를 비롯 효종 10년(1656) 목사 성이성의 청덕 유애비 등 조선시대에 세워진 30여기의 비석군이다. 이 비석들은 진주성 또는 시내 걱처에 있던 것을 1973년 문화재보협회 진주지부에서 모은 것이다. <출처:진주시청>
다양한 형태의 공덕비들. 병마절도사는 실제로는 지방민으로부터 많은 세금을 거둬들이고 병역업무를 관리하기때문에 민폐를 많이 끼치기 쉬운 관직으로 철종대 경상병사 백낙신은 다양한 방법으로 농민을 수탈하여 진주민란의 원인이 되었다.
병마절도사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곳을 공식 연회 등이 열렸던 촉석루이다. 진주는 평양과 함께 기생과 연회로 대표되는 조선시대 지방관료들이 화려한 생활모습를 보여주었던 곳이다.
진주성 공북문
용다리전설이 있는 옛 진주에 있던 돌다리 석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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