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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China)

[중국 취푸(曲阜)] 공묘(孔庙), 장서를 보관하던 규문각(奎文阁)

younghwan 2014. 2. 24.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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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송대 공묘 출입문이었던 대중문을 지나면 다시 측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넓은 정원이 나타나고 5번째 출입문인 동문문(同文门, Tongwen Gate)이 나타난다. 동문문 또한 북송대 처음 세워진 출입문으로 조선시대에 많이 볼 수 있는 다포계 공포를 하고 있는 목조 건축물이다. 동문문 서쪽편에는 공묘내 남아 있는 많은 비석들 중에 명나라 영락제(1417)때 세운 영락비정과 효종대(1504)에 세운 홍치비를 볼 수 있다.

 동문문을 지나면 역대 황제들이 하사한 그림, 글, 서적 등을 보관하던 장소인 규문각(奎文阁)을 볼 수 있다. 규문각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정조가 학술기관으로 설립했던 규장각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같은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당인 대성전 앞쪽에 서적을 보관하던 규문각이 배치된 것은 후대 국자감, 성균관, 향교 등에서 볼 수 있는 강학공간과 비슷한 공간배치라 할 수 있다. 규문각은 앞면 7칸의 3층 목조건축물로 북송 진종때인 1018년에 처음 세워진 건물이라고 하며, 후대에 여러차례 중건이 있었지만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현존하는 목조 건축물로 중국내에서 손꼽히는 건물이다.

 취푸(曲阜) 공묘(孔廟)는 춘추전국시대 노나라 수도로 공자가 살았던 취푸(曲阜)에 세워진 공자를 모신 사당으로 베이징 국자감 공묘(孔廟)와 함께 중국과 동아시아에 세워진 많은 공묘를 대표하는 사당이다. 공자 사후 노나라 애공이 공자가 살던 집에 처음 사당을 세운 이래 역대 황제의 후원으로 계속 확장되어 현재 중국에서는 자금성 다음으로 큰 역사적 건축군이다.



동문문(同文门, Tongwen Gate). 공묘(孔廟) 4번째 출입문인 대중문(大中门)을 들어서면 삼도(三道)는 계속 이어지면서 정면에 5번째 출입문인 동문문(同文门)이 나타난다. 동문문은 송대에 처음 세워졌으며 후대 왕조에 계속 중건되어 왔다. 청나라 강희제때에는 "삼동문(參同门)"이라 불렀으며, 옹정제때 황제의 명령으로 동문문(同文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동문문(同文门, Tongwen Gate).
First built in the Song Dynasty, it was rebuilt in the Successive dynasties. It was named "Santong Gate" under the reign of the emperor Kangxi of Qing dynasty and renamed "Tongwen Gate" by the imperial order in the seventh year under the reign of the emperor Yongzheng(1729), according to the saying "writing in the same characters and acting in the same ethics." from the Rites. <출처: 취푸 공묘>


동문문도 벽돌을 일부 사용하기는 하지만 삼문의 형식을 하고 있는 목조건축물이다.


동문문(同文门) 현판.  <예기>의 "같은 글자로 적는 것은 같은 생각을 행동하는 것"이란 문구에서 가져왔다. 


다포계 양식을 하고 있는 공포와 겹처마. 우리나라와는 달리 단청에 푸른색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안쪽에서 본 동문문


동문문을 지나면 삼도(三道)는 규문각(奎文阁)이라는 상당히 큰 규모의 목조건물과 연결된다.


규문각(奎文阁)은 북송 진종대(천희 2년, 1018)에 처음 세워졌다. 장서루(藏书楼)로 서책을 보관하던 장소였던 것으로 보인다. 금색 유리기와로 지붕의 3층(외형만) 목조 건축물로 현존하는 중국 최고의 목조건축물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벽돌을 많이 사용한 명.청대의 건축물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다포계 공포를 하고 있는 목조건축물이다.

규문각(奎文阁, The Kuiwen Pavilion)
It was originally built in the 2nd year of Tianxi of the Song dynasty(1018). It was given the present name in the 2nd year of Mingchang of the Jin Dynasty(1191). When it was renovated, with a yellow-tile-covered roof, triple upturned eaves, four layers of dongong(brackets between crossbeams and columns) and double fully wooden structure, it is among the best wooden pavilions in china. <출처: 취푸 공묘>


조선시대 목조건축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다포계 공포에 겹처마를 하고 있으며, 단청에는 푸른색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규문각 현판. 장서루(藏书楼)로 역대 황제들이 하사한 그림과 서적들을 보관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奎主文章"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으로 규문각이라는 이름은 금나라 장종때(명창 2년, 1191)에 붙여졌다고 한다. 정조때 학술연구기관이었던 '규장각'도 이곳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규문각 추녀마루의 잡상. 잡상은 황제를 상징하는 궁궐건물에만 사용하는 공묘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규문각 내부. 지금은 주요 비석 탁문 등을 전시하고 있다.


규문각 건물 내부 천장. 다포계 공포를 내부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동문문 서쪽 측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정원에는 명나라대에 세워진 홍치비(弘治碑)와 영락비정(永乐碑亭)가 있다. 홍치비는 명나라 효종대(홍치 17년, 1504)에 세워졌다. 원래 비석을 보호하는 비정(碑亭)이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비문은 해서체로 적혀 있다 

홍치비(弘治碑, Stone tablet of Emperor Hongzhi)
This was built in the 17th year of Hongzhi of Ming Dynasty(1504). The pavilion housing the stone tablet collapsed due to disrepair. The inscription on the tablet is written in regular script.  <출처: 취푸 공묘>


홍치비 거북받침돌


구름과 2마리의 용이 새겨진 머릿돌


홍치비에 새겨진 글씨


홍치비 뒷편에는 명나라 영락제때(영락 15년, 1417)에 세워진 영락비가 모셔진 영락비정이 있다. 이 비정(碑亭)은 홍치2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하였으며, 현재의 건물 또한 현대에 다시 지어진 것이라 한다. 원래는 목조건축물이었던 것을 유리기와를 얹은 벽돌로 건축한 것으로 보인다.

영락비정(永乐碑亭, Pavilion Housing the stone tablet of Emperor Yongle)
This was originally built in the 15th year of Yongle of the Ming Dynasty (1417). Destroyed in fire in the 12th year of Hongzhi. (1499). It was rebuilt in the 12th year of Hongzhi(1503). The present pavilion was rebuilt again in the Republic of China. <출처: 취푸 공묘>


영락비(永乐碑) 거북받침돌. 대리석을 많이 사용한 명대 후기 또는 청대와는 달리 우리나라처럼 화강석을 사용하고 있다.


구름과 용이 새겨진 머릿돌


비석에 새겨진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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