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story Traveling

궁궐_종묘

[창경궁] 명정문 및 행각(보물 385호), 품계석이 세워져 있는 정전 앞 마당

younghwan 2012. 9. 10. 13:02
반응형


 창경궁은 조선3대 국왕인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머물렀던 수강궁터에 지어진 궁궐로 상왕이 거처하는 궁궐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태종 이후 조선왕조에서는 상왕이 존재하지 않았고, 대신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국왕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했던 대비들이 존재했다. 이런 까닭에 창경궁은 주로 왕실의 어른인 대비를 위한 공간의 성격이 강한 궁궐로 실제로 창경궁은 성종 14년(1483)에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를 위해 처음 지은 궁궐이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실제로 많이 사용하지 않다가, 임진왜란때 경복궁과 함께 불타버린 후 창덕궁과 함께 중건되어 주로 사용되었으며, 동궐로 불리었다. 창경궁 일원은 대비를 비롯하여 왕실에 딸린 후궁, 어린왕자나 공주 등이 살았던 주거공간으로 조선후기 후궁이 낳은 왕자로서 왕위오른 국왕들이 태어나고 어린시절을 보낸 공간이어서 더욱 중요시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같은 공간을 사용하지만, 별도의 정전인 명전전과 조정을 두어 창덕궁과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실제로 창경궁 정전은 국가행사를 위해서 많이 사용된 공간은 아니지만 권력이 대비에 집중되던 수렴청정 기간 등에 주요 행사가 치러졌던 것으로 보인다. 창경궁 정전이 있는 조정은 그 규모에 있어서 창덕궁과 거의 비슷한 규모와 형태를 하고 있으며, 동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조정 마당에는 박석을 깔고 중앙에 행차용 삼도를 두어 왕궁의 격식을 갖추었다. 창경궁 조정은 명정문과 행각이 조정을 둘러싸고 있으며, 행각들은 왕실 친위부대의 주둔지나 황실의 초상을 치르기 위한 재실로도 쓰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청경궁 조정 출입문인 명정문. 명정문은 성종대 창경궁을 처음 세울때 지었으며, 현재의 것은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은 광해군대에 중건한 것으로 보물 385호로 지정되어 있다. 건물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명정문은 임진왜란 이후 중건되었지만 조선전기 건축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는 건축물이라고 한다. 


명정문 현판. 명전문은 궁궐 건물 양식으로 겹처마에 다포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으며, 단청을 입혀 놓고 있다.


명정문 출입문. 


명정문 내부 천정. 천정의 건물 뼈대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을 하고 있으며, 일부는 우물천정으로 꾸몄다. 


창경궁 명정문 계단. 삼도의 형실을 하고 있지만, 소맷돌과 석수가 설치되어 있지는 않다.


창경궁 명정문과 좌.우의 행각들


2009년 창경궁 명정문


명정문 사이로 보이는 창경궁 정전인 명정전과 조정 마당


창경궁 정전인 명정전과 박석을 깔아 놓은 넓은 마당인 조정. 창경궁은 상왕이 거처하는 공간이라는 개념을 가진 궁궐로 실제로 이 곳에서 국가적인 행사는 많이 열리지 않았지만, 그 규모나 형식에 있어서 궁궐 조정의 격식을 갖추고 있는 공간이다.


조선시대 국왕을 중심으로 한 정부를 의미하는 조정은 국가적인 중요 행사가 치러지는 궁궐 정전 앞 마당을 일컫는다. 창경궁 정전 명정전 앞 마당도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국가적인 주요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마련된 넓은 마당이다. 회랑(행각)으로 둘려싸여진 이 마당에는 관리들의 그 지위에 맞게 도열할 수 있도록 품계석이 세워져 있고, 중앙에는 삼도가 설치되어 있다.


명전전 앞에 줄을 지어 서 있는 품계석.


명정전에서 내려다 본 명정문과 조정


창경궁 정전 마당인 조정을 둘러싸고 있는 회랑형식의 행각. 정전과 행각으로 둘러싸여진 형태는 고대 로마의 공공집회장소이자,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던 바실리카와 거의 비슷한 구조라 할 수 있다.


창경궁 정전을 둘러싸고 있는 회랑 내부


명정문과 좌.우의 회랑(행각)


명정전 오른쪽편 회랑


궐내각사가 있던 남쪽편으로 출입하는 작은 출입문


회랑 바깥쪽


창경궁 정전인 명정전과 박석을 깔아놓은 넓은 마당인 조정.


2009년 창경궁 명정전과 조정


2009년 명정문

창경궁 명정문 및 행각, 보물 385호, 서울 종로구 창경궁로
성종 15년(1484) 창경궁을 세울 때에 지은 것이지만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광해군 시절 다시 지었다. 회랑 중 남쪽과 북쪽 일부분은 일제시대 때 철거되었던 것을 1986년 복원한 것인데, 2칸 규모로 기둥 윗부분에 새부리 모양으로 뻗어 나온 장식을 하였다. 명정문의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데 이를 다포 양식이라 한다. 건물 안쪽은 천장의 뼈대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지만 일부는 천장 속을 가리는 우물천장으로 꾸몄다. 건물의 짜임이 착실하고 알차서 조선 중기의 문을 대표할 만하고 짜임새가 조선 전기 건축양식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어 궁궐 중문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