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서궐이라 불리웠던 경희궁은 정전.동궁 등 1,500여칸에 이르는 큰 궁궐이었지만 일제강점기에 대부분의 전각들이 철거되었고, 일본인들을 위한 학교가 세워졌었다. 태령전은 경희궁에 있던 많은 전각들 중 하나로 국왕의 집무장소였던 편전이 자정전 서쪽편 언덕에 자리잡고 있던 건물이다. 원래는 특별한 용도가 없었던 건물인데 영조대에 영조자신의 어진을 모시는 건물로 사용하면서 태령전이라 불렀다. 이 건물 또한 일제강점기에 없어졌던 것인데, 경희궁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대표적으로 복원되었다고 할 수 있다.
태령전 뒷편에는 서암이라 불리는 바위가 있는데 원래 이름은 왕암이라고 하며, 이곳에 왕기가 서렸다고 하여, 광해군이 서궐을 창건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경희궁이 있던 이곳은 임진왜란 이후 정원군의 사저가 있던 장소였는데 왕기가 서렸다는 이유로 광해군이 이곳에 서궐을 세웠다고 하며, 실제로 정원군의 아들이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라고 한다.
경희궁 편전 서쪽편 언덕에 위치한 영조의 어진을 모신 전각인 태령전이다. 원래 특별한 용도가 없었던 곳으로 경희궁의 많은 전각 중 하나였지만, 영조가 자신의 어진을 모시는 장소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허물어졌던 것을 경희궁 복원과정에서 대표적으로 복원된 전각이라 할 수 있다. 앞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주거용 건물이라고 보다는 회의를 하는 등 업무를 보던 공간으로 보인다.
태령전에 모셔진 영조 어진
태령전 현판과 단청
옆쪽에서 본 태령전
태령전 추녀마루의 잡상들
태령전 출입문과 행각
바깥에서 본 태령전
태령전 뒷편에 있는 서암. 서암은 원래 '왕암'으로 불렸는데, 그 이름으로 인해 광해군이 이곳에 경희궁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숙종 때에 이름을 '서암'으로 고치, 숙종이 직접 사방석에 '서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겨 두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출처:문화재청>
태령전 뒷편 바위에서 작은 샘물의 솟아나고 있다.
바위틈으로 솟아나는 작은 샘물
샘물이 흘러내리는 작은 물길
물길을 따라서 흐르는 샘물.
샘물 오른편에 있는 큰 바위
서암에서 내려다 보이는 경희궁 정전인 숭정전과 편전인 자정전
경희궁 뒤편 언덕에 있는 작은 운동장. 원래 경희궁 전각이 있었던 자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태령전 옆 숲속길
태령전
이곳은 영조의 어진을 모셔두던 건물이다. 이 건물은 본래는 특별한 용도가 지정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영조의 어진이 그려지자 1744년(영조 20)에 이곳을 다시 수리하여 어진을 모셨다. 선원전의 경우 선대 국왕들의 어진을 모셨던 것에 비해서 태령전은 영조 재위 당시에 현왕인 영조 자신의 어진을 모셨다는 점이 특징이다. 태령전은 일제에 의해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지만 서울시는 경희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서궐도안에 따라 현재의 건물로 복원하였고 현판은 석봉 한호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들었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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