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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사찰

강화 정족산 전등사, 강화도를 대표하는 유서깊은 사찰

younghwan 2010. 9. 12.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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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등사는 강화도 남단 정족산에 자리잡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아주 유서 깊은 사찰 중의 하나입니다. 정족산을 둘러싸고 있는 삼랑성은 단군조선때 쌓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삼국시대부터 성이 존재했던 것 같다고 합니다..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때 아도화상이 창건한 절로 기록에 남아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고 합니다.
 
 삼랑성 성곽의 양식이 고구려 산성과 비슷한 점으로 보아 고구려와 관계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는 절입니다. 전등사는 조선시대에도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어 조선의 사고가 설치되어 운영되었고 병인양요때 프랑스의 침입을 물리치기도 한 곳입니다. 전등사내에는 보물로 대웅전, 약사전, 동종이 있고 그외 여러 문화재가 남아 있는 사찰입니다.



강화 정족산에 자리잡고 있는 전등사입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전등사의 중심 불전인 대웅전입니다. 조선 중기에 만들어진 건물로서 보물로 선정되어 있습니다. 오래된 목조 건물이라서 그런지 낡아 보이기는 하지만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져 있는 건물입니다.  


강화 전등사에는 중심 불전인 대웅전 외에 서쪽으로 명부전과 약사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 처럼 죽은이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명부전이 있고, 특이하게 전등사에는 약사여래를 모신 보물로 지정된 약사전이 있습니다. 약사전은 오래된 불전답게 규모가 적고 아담한 건물입니다.



강화 전등사의 입구인 대조루는 불이문과 같은 역할을 하는 누각으로서 예전에는 멀리 강화해협이 보였다고 합니다만 지금은 수목이 우거져서 전망히 확 트이지는 않습니다. 전등사는 다른 사찰과는 달리 금강문, 사천왕문 같은 출입문이 별도로 없고 대조루가 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누각으로서는 아주 작은 건물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지 지금은 기념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전등사에는 지금 두개의 범종이 있습니다. 하나는 대조루 옆 종루에 걸려 있는 지금 사용중인 새로 만든 범종이 있고, 다른 하나는 경내 서쪽편 종각에 보관중이 보물로 지정된 범종이 있습니다. 보물로 지정된 범종은 원래 입구의 종루에 걸려 있었으나 최근에 보관을 위해 별도의 종각을 만들어 보관하고 있습니다. 전등사 범종은 일반 범종과는 달리 중국 송나라에서 수입된 범종인 까닭에 중국 범종 양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전등사 경내 서쪽편 언덕위에 자리한 극락암입니다. 명부전과 종각 사이의 계단을 오르면 볼 수 있는 아담한 전각입니다.


향로전은 법당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조선 시대에는 상궁이나 나인들이 기도하던 곳으로 쓰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 것으로 봐서는 왕실이나 고위층 등이 전등사에 머물던 곳으로 추측됩니다. 그래서 대웅전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전등사 대웅전 앞 마당입니다.

전등사 앞 마당을 지키고 있는 고목

전등사에 있는 정족산 사고로 가는 길

전등사 출입문 역할을 하는 대조루를 오르는 계단

전등사를 오르는 두 길이 만나는 지점

삼랑성 동문을 들어서면 볼 수 있는 양헌수 장군 병인양요 승전 기념비

삼랑성 동문

삼랑성 남문




전등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중창기문(重創記文)에는 381년(소수림왕 11)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한 절로, 1266년(원종 7)에 중창된 이래 3, 4차례의 중수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현존하는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확실하게 단정짓기는 어렵다. 창건 당시에는 진종사(眞宗寺)라고 했으나 1282년(충렬왕 8) 충렬왕의 비인 정화공주가 승려 인기(印奇)를 중국 송나라에 보내 대장경을 가져오게 하고, 이 대장경과 함께 옥등(玉燈)을 이 절에 헌납한 후로 전등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이 옥등은 전하지 않고 있다. 1337(충숙왕 6), 1341년(충혜왕 2)에 각각 중수되었다고 하나 당시 전등사의 역사를 알려주는 기록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1605(선조 38), 1614년(광해군 6)에 일어난 2차례의 화재로 절의 건물들은 완전히 소실되었고, 그 다음해 4월부터 지경(志敬)이 중심이 되어 재건하기 시작해 7년 만인 1621년 2월에 완성되었다. 1678년(숙종 4)에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건립되면서 왕조실록을 지키는 사찰로 왕실의 보호 아래에 있게 되었다. 이 사고장본(史庫藏本)은 1909년 서울로 옮겨져 조선총독부 분실(分室)에 보관되었다가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707년에는 유수(留守) 황흠(黃欽)이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별관을 또 지어 취향당(翠香堂)이라 하고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했다. 그뒤에도 1749, 1839, 1855, 1871, 1876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을 뿐만 아니라 근래까지 대규모의 중수 불사(佛事)가 이루어졌다. 이때 대조루(對潮樓)를 비롯해 양곡을 보관하는 정족창(鼎足倉)·석량고(石糧庫) 등의 건물들이 세워지면서 현재와 같은 대규모의 사찰이 되었다. 1912년 일제강점기 때 강화·개성 등 6개군에 있는 34개 사찰을 관리하는 조선불교 30본산의 하나로 승격되었다. 또한 이 절의 뒤편에 있는 정족산의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하여 신성시되는 점이 주목된다. 경내에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원건축인 대웅전(보물 제178호)·약사전(보물 제179호)을 비롯해 명부전·삼성각·향로각·적묵당·강설당·범종각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중국 북송시대의 범종(보물 제393호)과 전등사의 말사인 정수사(淨水寺)에서 개판된 조선시대의 법화경판(1544)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경판은 6·25전쟁 때 파주에 있었던 모부대에서 1매를 가져가 현재 104매만 남아 있다. 그밖에 거대한 청동수조(靑銅水槽)와 대웅전에서 사용했던 작은 옥등 등이 있다. <출처: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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