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 위패를 모신 용주사 호성전 앞에 있는 부모은중경탑. 호성전에는사도세자, 혜경궁홍씨, 정조대왕, 효의왕후 김씨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매일 여섯번의 재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1. 홍살문, 들어가는 길
정조대왕과 사도세자의 능인 융륭, 건릉 부근에 있는 화성 용주사는 정조대왕이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고, 위패를 모시기 위해서 중건한 사찰로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홍살문이 사찰입구에 자리잡고 있다. 일반적인 사찰에서 입구 역할을 하는 사천왕문과 일주문은 없었으나 최근에 사천왕상을 모신 출입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홍살문이 오랫동안 화성 용주사 입구 역할을 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출입문에서 용주사 삼문까지의 길 양쪽에는 글을 새겨놓은 자연석이 놓여 있어 색다른 분위기를 주고 있다.
용주사 사천왕문. 최근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용주사 들어가는 길. 용주사 들어가는 길.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기때문에 들어가는 길에 판석을 깔아 놓고 있다. 길 양쪽으로는 글을 새겨놓은 돌들이 줄지어 있다.
2. 삼문, 융건릉의 재궁역할을 보여주는 유교식 출입문
화성 용주사는 정조대왕이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시고 명복을 빌기 위해 중건한 사찰로 사도세자은 능인 유릉의 재궁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를 특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이 출입문인 삼문과 홍살문, 그리고 길에 깔아 놓은 판석일 것이다. 삼문은 보통 궁궐이나, 사당, 서원 등에 사용하는 유교적인 예법을 반영한 문으로 사찰 출입문으로 사용하지 않지만 능의 재궁 역할을 하는 서을 봉은사 등에만 있는 양식이라 한다. 삼문 양쪽으로는 중건 당시부터 세워진 행랑채가 있다. 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석탑이 있고, 서쪽편에는 최근에 만든 범종이 있는 불음각이 있다.
용주사 출입문인 삼문 입구를 지키는 해태상. 이 또한 궁궐 건물 등에 사용하는 석물이다.
삼문을 들어서면 중앙에 석탑이 있고, 삼문에서 사도세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호성전까지는 신도로서 판석이 깔려있다.
3. 사찰 누각인 천보루
용주사 누각인 천보루는 정조대왕이 용주사를 건설할때 세워진 건축물로 일반 사찰 누각과는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천보루 기둥 아래 초석은 석조기둥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경복궁 경회루의 1층 기둥을 연상시키는 초석이며, 궁궐 건물의 양식을 사용했다고 볼 수있다. 천보루 양쪽에는 요사채로 사용하는 회랑이 연결되어 있는데, 이 또한 사찰 건물이 아니라 권문세가의 저택을 연상시키는 모습을 하고 있다.
용주사 천보루를 들어서면 좌.우에 위치하고 있는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채들이다. 동쪽편 건물은 나유타료라 불리며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채이고, 서쪽편 건물은 만수리실이라 하며 선당으로 용주사를 찾는 손님들이 기거하는 공간이다. 용주사에는 대웅전을 제외하고는 큰 법당은 많지 않으나, 서울과 가깝고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었던 까닭에 많은 스님들이 머물고, 찾아 오는 손님이 많았던지 삼문 좌.우의 행랑채를 포함하여 상당히 많은 요사채를 가지고 있다. 최근에는 정조대왕을 효를 중심으로 일반인들을 교육하는 효행교육관을 운영하고 있다.
5. 중심불전인 대웅보전
용주사 중심불전인 대웅보전은 조선후기 정조때 지은 건물로 당대의 사찰 건축 기술과 궁궐 건축 기술이 합쳐진 건물이다. 앞면 3칸의 건물로 화려한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화려한 단청에 용머리를 새겨 놓고 있으며, 금빛 글씨가 빛나는 '대웅보전'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편액이 걸려 있다. 대웅전 내부에는 김홍도가 관여했다고 알려진 탱화와 닫집 등이 있다. 대웅전 하단부 초석은 일반 사찰과는 달리 자연석을 쓰지 않고, 궁궐 건물에서 사용하는 장대석을 사용하고 있으며, 지붕의 형태를 보면 궁궐 건물등에 사용하는 치미를 사용하고 있어 다른 사찰의 불전과는 많이 다른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6. 호성전, 사도세자 위패를 모시기 위한 전각
호성전은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세운 전각으로 용주사 창건의 동기가 되는 건물이다. 지금 이 곳에는 사도세자, 혜경궁홍씨, 정조대왕, 효의왕후 김씨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매일 여섯번의 재를 오렸다고 한다. 용주사 경내의 박석이 깔린 길, 삼문, 홍살문 등 궁궐식 예법이 들어간 건물들이 용주사에 있는 이유가 호성전에서 위패를 모셨기 때문이며, 당시 정조대왕이 이 곳 용주사로 여러번 행차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건물은 한국전쟁때 불타버린 것을 새로 중건하였다고 한다.
7. 지장전, 천불전, 시방칠등각
용주사 지장전, 원래 없었던 건물로 인근 사찰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용주사 천불전
용주사 시방칠등각
8, 용주사 범종, 고려초기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3대 범종 중 하나
용주사 범종은 이 사찰을 대표하는 문화재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상원사 동종, 성덕대왕신종과 더불우 우리나라 3대 범종이라 할 수 있는 문화재로 크기는 큰 편은 아니지만 종의 모양새나 새겨진 문양의 예술성이 뛰어나고 보존상태는 아주 양호하다. 이 동종의 고리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이 힘차게 종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종의 몸체에는 비천상과 삼존상을 두고 있는데 성덕대왕 신종과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래서 신라 동종 양식으로 만들어진 범종이라고 한다.
용주사(龍珠寺)는 현륭원(顯隆園)의 원찰(願刹)로서 왕실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국가적 사찰이다. 용주사가 창건된 정조 14년(1790)은 성리학이 정치이념으로 자리 잡은 조선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고 왕실의 안녕을 기리는 것을 불력에 의지하고자 하였다. 용주사가 위치한 곳은 신라 문성왕 16년(854)에 창건되었다가 고려시대에 소실된 갈양사(葛陽寺)라는 절이 있던 곳으로, 이곳을 택하여 과거의 명찰을 재건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현륭원의 원찰을 조성하려는 정조의 효심에 기인한 창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같이 왕실과 직접적인 연관을 맺었던 만큼, 용주사는 여타의 사찰과는 다른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무엇보다 사도세자(思悼世子)와 혜경궁 홍씨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었고, 정조가 죽은 뒤에는 정조와 비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의 위패가 각각 봉안되어 있었다. 또한, 승려의 생활을 감독하는 전국5규정소(全國五糾正所)와 전국의 사찰을 통제하는 전국5규정소(全國五糾正所)이 설치되어 절의 위세를 크게 떨칠 수 있었다. 또, 전체 가람배치는 일반 절들과 크게 다른 점은 없으나, 사찰의 영건부터 국가가 관여한 만큼 전각의 구성방식에 있어서는 궁궐이나 관아 같은 형상을 보여준다. 천보루를 받치고 있는 반듯반듯한 장초석이나 판벽으로 마감된 천보루 좌우 승방의 입면, 그리고 대웅전의 기단과 지붕 장식 등이 그 예이다. 또, 용주사 대웅보전에는 예사롭지 않은 탱화가 걸려있다. 당대의 탱화들이 일반적으로 평면적이고 선적인 구성을 보여주고 있음에 반해, 용주사 탱화에서는 서양풍의 명암법과 다양한 색채가 혼합되어 있어 훨씬 화려하고 사실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기록상에는 김홍도를 비롯한 당대의 신진 화가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어 서양화풍을 익힌 화가들의 솜씨임을 추정할 수 있게 한다. 이 외에도 용주사에는 정조가 용주사 부처님을 받들고 복을 기원하기 위해 쓴 봉불기복게와 부모의 열 가지 은혜를 찬양한 부모은중경이 제작, 보관되어 있어 부친에 대한 정조의 지극한 효심을 느껴 볼 수 있다. <출처:문화원형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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