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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신륵사는 남한강변에 자리 잡고 있는 아름다운 절이다. 보통의 절들은 산속에 있는데 반해 신륵사는 조선 시대 서원이나 정자들 처럼 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특색이 있다. 영남지방의 대형 사찰들에 비해서는 큰 편은 아니지만 건물들의 배치가 오밀조밀하고 아름다운 정원처럼 잘 꾸며져 있는 사찰입니다.
남한강 조포나루 인근에 있는 사찰로 남한강을 오가는 많은 사람들이 이 곳 신륵사에서 잠시 쉬어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신륵사는 여주의 세종대왕 능인 영릉을 지키는 원찰을 성격을 갖고 있는 사찰로 특히 세종대왕이 아들인 세조가 많이 찾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륵사 중심불전인 극락보전이 있는 경내 모습. 전각의 크기가 크지는 않지만 오목조목 잘 구성되어 있다.
1. 신륵사 조사당,극락보전
신륵사의 중심불전인 극락보전이다. 앞면 3칸의 전형적인 불전 건물로 오래된 건물처럼 보이지만 조선후기 정조때 완공된 건물이다.
여주 신륵사 뒷쪽편 보제존자 석종형 부도가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조사당이다. 정면 1칸의 작은 건물이지만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조선초에 이름을 떨친 지공,나옹,무학대사의 덕을 기리기 위해 영정을 모시고 있다고 한다.
신륵사 명부전. 신륵사가 원찰의 성격을 갖고 있어서 그런지 건물이 다른 사찰에 비해서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2. 보제제존자 석종,석등
여주 신륵사 뒷동산에 자리잡고 있는 보제존자 관련 유적으로, 보제존자는 고려말, 조선초에 무학대사 등과 함께 이름난 승려인 나옹화상을 위한 부도탑, 부도비, 석등이 있다. 이 곳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은 전형적인 석종형 부도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에서 고려초까지 유행했으며, 전국적으로 많은 유적이 남아 있는 팔각원당형과는 달리 돌종의 모습을 하고 있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나옹화상의 사리를 봉안한 부도이다. 지상에 넓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성종형 부도를 안치하였다.
3. 신륵사 다층석탑, 다층전탑, 삼층석탑
신륵사 중심불전인 극락보전 앞에 있는 다층석탑. 그 양식이 완전하지 않아 보인다.
신륵사 다층전탑. 벽돌로 쌓아 만든 전탑으로 남한강으로 내려다 보고 있다. 신륵사가 있는 이 곳은 조포나루라고 불리며, 이포나루, 광나루, 마포와 함께 한강의 4대 나루터로 불리며, 육상 수운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이 신륵사 다층전탑은 남한강을 오가는 많은 나룻배들에게는 등대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탑자체로는 크기가 작고, 모양도 볼품이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탑이 서 있는 위치로 인해서 아름다운 신륵사 3층석탑. 남한강을 오가는 수많은 나룻배들을 지켜보고 있다.
4. 신륵사 남한강변
남한강변 3층석탑 옆에 있는 정자. 이 곳 신륵사에서 남한강 풍경을 즐기면서 잠시 쉴 수 있는 곳이다. 원래부터 이 곳에 정자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6. 신륵사 이모저모
신륵사 강당인 구룡루. 지금은 창고로 쓰로 있지만, 남한강 경치가 상당히 아름다운 강당이다.
신륵사가 원찰의 성격을 갖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 수령이 수백년된 향나무
신륵사 입구쪽에 자리잡고 있는 범종입니다. 신륵사에는 별도의 출입구가 없이 범종각이 입구를 지키고 있다. 주변에 세종대왕릉이 있는 관계로 조선시대에 사찰의 건물 등을 지을때 정부의 규제를 많이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신륵사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 사천왕문 같은 출입문이 별도로 없다.
남한강변을 따라서 신륵사로 들어가는 길. 나무들이 깨긋하게 심어져 있다.
신륵사 앞에 있는 수령이 수백년된 은행나무.
신륵사 바로 앞으로 남한강이 흐르고 있다.
☞ 신륵사
신륵사는 아름다운 경관과 많은 유물·유적들을 간직 하고 있으며 신라 진평왕 때 원효 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고, 고려 우왕 2년 (1376년)에 나옹선사가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되었다. 신륵사를 일명 "벽절" 이라 부르게 한 다층 전탑이 묵묵히 여강을 굽어보고 있으며 나옹선사의 당호를 딴 정자 강월헌(江月軒)에서는 그 옛날 시인 묵객들이 시 한수를 읊고 있는 것 같다. 신륵사는 남한강변의 수려한 자연 경관과 어우러져 많은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에 위치함으로서 대중과 접하고 구도의 기회를 넓힐 수 있는 곳이다. <출처: 여주군청>
☞ 신륵사 유래
예로부터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어느 날 원효대사의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라고 일러준 후 사라지니,그 말에 따라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이에 원효대사가 7일동안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의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한 후에야 그곳에 절을 지을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곳에 절을 짓기가 어려웠던 사실을 전하는 전설일 뿐 정확한 문헌사료가 없어 창건의 유래를 확실히 알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또한 절 이름에 관한 유래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고려 우왕 때 여주에서 신륵사에 이르는 마암 馬岩 이란 바위 부근에서 용마 龍馬 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설화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또 하나는 고려 고종 高宗때 건너편 마을에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이를 사람들이 붙잡을 수 없었는데, 이때 인당대사 印塘大師 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제압하였다하여 신력 神力 의 신" 神 " 과 제압의 뜻인 륵" 勒 "을 합쳐 신륵사 " 神勒寺 " 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농경사회에서 용은 물의 변화신으로 여겨져 왔다. 이처럼 용과 관련된 설화는 신륵사가 강가에 있음으로 해서 생겨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홍수와 범람이 잦은 남한강의 자연환경과 지역적 단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옛 선인들이 이 절을 세우고 강을 돌본 것에서 이러한 설화가 생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속에는 한국의 자생풍수에 따른 비보 裨補 적인 의미 역시 부여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려 때에는 신륵사 내 동대 東臺 위에 서 있는 전탑 때문에 벽절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출처: 신륵사>
남한강 조포나루 인근에 있는 사찰로 남한강을 오가는 많은 사람들이 이 곳 신륵사에서 잠시 쉬어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신륵사는 여주의 세종대왕 능인 영릉을 지키는 원찰을 성격을 갖고 있는 사찰로 특히 세종대왕이 아들인 세조가 많이 찾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륵사 중심불전인 극락보전이 있는 경내 모습. 전각의 크기가 크지는 않지만 오목조목 잘 구성되어 있다.
1. 신륵사 조사당,극락보전
신륵사의 중심불전인 극락보전이다. 앞면 3칸의 전형적인 불전 건물로 오래된 건물처럼 보이지만 조선후기 정조때 완공된 건물이다.
여주 신륵사 뒷쪽편 보제존자 석종형 부도가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조사당이다. 정면 1칸의 작은 건물이지만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조선초에 이름을 떨친 지공,나옹,무학대사의 덕을 기리기 위해 영정을 모시고 있다고 한다.
신륵사 명부전. 신륵사가 원찰의 성격을 갖고 있어서 그런지 건물이 다른 사찰에 비해서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2. 보제제존자 석종,석등
여주 신륵사 뒷동산에 자리잡고 있는 보제존자 관련 유적으로, 보제존자는 고려말, 조선초에 무학대사 등과 함께 이름난 승려인 나옹화상을 위한 부도탑, 부도비, 석등이 있다. 이 곳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은 전형적인 석종형 부도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에서 고려초까지 유행했으며, 전국적으로 많은 유적이 남아 있는 팔각원당형과는 달리 돌종의 모습을 하고 있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나옹화상의 사리를 봉안한 부도이다. 지상에 넓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성종형 부도를 안치하였다.
3. 신륵사 다층석탑, 다층전탑, 삼층석탑
신륵사 중심불전인 극락보전 앞에 있는 다층석탑. 그 양식이 완전하지 않아 보인다.
신륵사 다층전탑. 벽돌로 쌓아 만든 전탑으로 남한강으로 내려다 보고 있다. 신륵사가 있는 이 곳은 조포나루라고 불리며, 이포나루, 광나루, 마포와 함께 한강의 4대 나루터로 불리며, 육상 수운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이 신륵사 다층전탑은 남한강을 오가는 많은 나룻배들에게는 등대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탑자체로는 크기가 작고, 모양도 볼품이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탑이 서 있는 위치로 인해서 아름다운 신륵사 3층석탑. 남한강을 오가는 수많은 나룻배들을 지켜보고 있다.
4. 신륵사 남한강변
남한강변 3층석탑 옆에 있는 정자. 이 곳 신륵사에서 남한강 풍경을 즐기면서 잠시 쉴 수 있는 곳이다. 원래부터 이 곳에 정자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6. 신륵사 이모저모
신륵사 강당인 구룡루. 지금은 창고로 쓰로 있지만, 남한강 경치가 상당히 아름다운 강당이다.
신륵사가 원찰의 성격을 갖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 수령이 수백년된 향나무
신륵사 입구쪽에 자리잡고 있는 범종입니다. 신륵사에는 별도의 출입구가 없이 범종각이 입구를 지키고 있다. 주변에 세종대왕릉이 있는 관계로 조선시대에 사찰의 건물 등을 지을때 정부의 규제를 많이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신륵사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 사천왕문 같은 출입문이 별도로 없다.
남한강변을 따라서 신륵사로 들어가는 길. 나무들이 깨긋하게 심어져 있다.
신륵사 앞에 있는 수령이 수백년된 은행나무.
신륵사 바로 앞으로 남한강이 흐르고 있다.
☞ 신륵사
신륵사는 아름다운 경관과 많은 유물·유적들을 간직 하고 있으며 신라 진평왕 때 원효 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고, 고려 우왕 2년 (1376년)에 나옹선사가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되었다. 신륵사를 일명 "벽절" 이라 부르게 한 다층 전탑이 묵묵히 여강을 굽어보고 있으며 나옹선사의 당호를 딴 정자 강월헌(江月軒)에서는 그 옛날 시인 묵객들이 시 한수를 읊고 있는 것 같다. 신륵사는 남한강변의 수려한 자연 경관과 어우러져 많은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에 위치함으로서 대중과 접하고 구도의 기회를 넓힐 수 있는 곳이다. <출처: 여주군청>
☞ 신륵사 유래
예로부터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어느 날 원효대사의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라고 일러준 후 사라지니,그 말에 따라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이에 원효대사가 7일동안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의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한 후에야 그곳에 절을 지을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곳에 절을 짓기가 어려웠던 사실을 전하는 전설일 뿐 정확한 문헌사료가 없어 창건의 유래를 확실히 알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또한 절 이름에 관한 유래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고려 우왕 때 여주에서 신륵사에 이르는 마암 馬岩 이란 바위 부근에서 용마 龍馬 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설화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또 하나는 고려 고종 高宗때 건너편 마을에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이를 사람들이 붙잡을 수 없었는데, 이때 인당대사 印塘大師 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제압하였다하여 신력 神力 의 신" 神 " 과 제압의 뜻인 륵" 勒 "을 합쳐 신륵사 " 神勒寺 " 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농경사회에서 용은 물의 변화신으로 여겨져 왔다. 이처럼 용과 관련된 설화는 신륵사가 강가에 있음으로 해서 생겨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홍수와 범람이 잦은 남한강의 자연환경과 지역적 단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옛 선인들이 이 절을 세우고 강을 돌본 것에서 이러한 설화가 생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속에는 한국의 자생풍수에 따른 비보 裨補 적인 의미 역시 부여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려 때에는 신륵사 내 동대 東臺 위에 서 있는 전탑 때문에 벽절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출처: 신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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