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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전 정전이 입구인 내삼문 동쪽편으로는 작은 문이 있고 이 문을 통해서 들어가면 문화재로서 가치는 별로 없지만 역사적 의미가 아주 큰 전주사고 실록각을 볼 수 있습니다. 전주사고는 임진왜란 당시 유일하게 화를 면한 사고로서 건물은 당시에 불타 없어져 버렸지만 실록은 보존되어 지금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되었고 조선의 역사를 온전하게 전할 수 있게 한 장소입니다. 아마 경기전에 사고를 운영함으로써 철저한 보관에 힘쓸 수 있도록 한 의도로 보입니다. 전주사고를 보지못했을때는 사고(史庫) 건물이 꽤 큰 것으로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 의외로 건물크기가 작고 아담한 규모입니다.
1439년(세종 21) 사헌부의 건의로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에 있던 경기전(慶基殿) 안에 설치되었다. 처음에 실록들을 여러 차례 옮겨 보관하다가, 1445년 12월 서울 춘추관, 충주·전주·성주(星州) 사고에 각 1부씩 봉안하게 했다. 따라서 세종실록부터 편찬할 때마다 주자(鑄字)로 인쇄하여 각 사고에 1부씩 보관하도록 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모두 병화(兵火)로 불타고 4대 사고 가운데 전주사고의 실록만 남았는데, 이는 안의(安義)·손홍록(孫弘祿)의 공이 컸다. 이들은 태인(泰仁)의 선비로 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금산(錦山)에 침입했다는 소문을 듣고, 곧 전주로 달려와 실록과 태조영정을 수호하던 경기전 참봉 오희길(吳希吉) 등과 상의해 태조부터 명종까지 13대에 걸친 실록 804권과 태조영정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겼다. 다음해 7월 조정에 인계할 때까지 14개월 동안 무사(武士)들이 번갈아가며 지켰다. 조정에서 사관을 내장산에 파견해 실록과 영정을 해주·강화도·묘향산으로 옮겼다가, 1603년 7월부터 다시 출판하여 전주사고의 실록원본과 교정본 및 새로 출판한 3부를 합해 5부를 서울 춘추관과 마니산·태백산·묘향산·오대산에 사고를 지어 봉안했는데, 전주사고의 실록원본은 마니산에 보관되었다. <출처: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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