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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해안은 조선시대 국방상 아주 중요한 장소로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비한 최후의 보루로 생각하여 나름 철저한 방비를 해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해안을 따라서 많은 돈대와 보, 진을 설치해 놓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육지와 강화 사이의 염하를 경계로 하는 해안에 많은 군사시설들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중 갑곶돈대는 서울에서 강화로 들어오는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군사 시설로 여겨져 왔습니다. 지금의 갑곶돈대는 70년대에 고증을 통해서 복원해 놓은 시설로 강화역사관 내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구(舊) 강화대교 입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강화를 들어오는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갑곶 돈대입니다. 갑곶나루터는 서울에서 강화로 들어오는 출입구로서 강화해안에 있는 많은 요새 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곳입니다.
갑곶 돈대는 원형이나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다른 돈대와는 달리 자연지형에 따라 성벽을 쌓아 놓고 있습니다. 염하를 지나가는 선박을 공격하기 위해서 포를 설치해 놓고 있습니다. 돈대에는 많은 포를 준비해 놓고 있지는 않고 포대는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 낮은 지대에 설치해 놓고 있습니다.
강화 해안의 돈대는 적이나 지나가는 선박을 감시하기 위해서 시야가 좋은 곳에 설치해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돈대에 올라서면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갑곶 돈대에 관광객을 위해서 설치해 놓은 정자입니다. 원래부터 있었던 정자는 아닌 것 같고 강화역사관을 지으면서 만든 정자로 보입니다. 물론 좋은 전망을 제공해 줍니다.
갑곶 돈대의 성벽입니다. 원래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고 1970년대에 고증을 통해 복원해 놓은 시설입니다.
갑곶 돈대에 전시해 놓고 있는 조선시대 수군이 사용하던 대포입니다.
갑곶 돈대에서 내려다 본 포대와 염하의 풍경입니다.
위성사진(출처: 야후지도)
돈대는 작은 규모의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이다. 갑곶돈은 고려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고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이다.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甲比古次)라 부른데서 갑곶이라 이름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고려 때 몽고군이 이곳을 건너려고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 한탄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전설도 있다. 조선 1644년 강화의 요충지마다 군대 주둔지를 설치할 때, 제물진에 소속된 돈대로서 1679년에 완성되었다. 고종 3년(1866) 9월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6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0월에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은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게 패하여 달아났다. 1977년에 옛터에 새로이 옛모습을 되살려 보수, 복원이 이루어졌다. 지금 돈대 안에 전시된 대포는 조선시대 것으로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적의 선박을 포격하던 것이다. <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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