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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산성_읍성)

파주 중성산 칠중성(七重城), 나.당 전쟁과 한국전쟁 격전의 현장

younghwan 2010. 9. 2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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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 임진강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칠중성(七重城)입니다. 워낙 격전이 많았던 곳이고, 특히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던 파주 감악산 인근에서 가장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던 곳이어 과거의 성벽과 시설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한국전쟁의 연장선으로 많은 참호들과 군사시설이 있는 곳입니다. 칠중성이 있는 이 곳은 남북한 세력이 부딪히는 임진강 중류의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고구려와 백제의 투쟁, 고구려와 신라의 투쟁, 나.당 전쟁과 최근의 한국전쟁의 격전장입니다. 그래서 부근에 고구려성과 백제토성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칠중성이 있는 중성산 정상에 올라서면 북쪽 임진강 방향을 막힌 산이 없어서 조그만 움직임도 쉽게 관찰할 수 있는 지형적 특징으로 인해 전략적 중요성을 한눈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파주 칠중성이 있는 중성산 정상부입니다. 나.당전쟁과 한국전쟁의 격전장으로 그에 어울리게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정상에 올라서면 남쪽으로는 근처에서 가장 높은 산인 감악산이 있고 북쪽으로는 임진강이 가로질러 흐르고 있습니다.

중성성 정상에서 북쪽으로 내려다 보면 평야지대 가운데로 임진강이 흐르고 있고, 비록 147m밖에 안되는 낮은 야산이지만 주위를 가로 막고 있는 산이 거의 없습니다. 이 곳 정상에서는 사방으로 움직이는 인마를 관찰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이 곳에 산성을 쌓고 있으면 전방 넓은 지역의 통제가 가능합니다.

칠중성 중성상 남쪽편에는 근처에서 가장 높은 산인 감악산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기에서 칠중성의 범위가 어디까지 이고, 어느 부분에 성벽을 쌓았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칠중성 남쪽편의 적성면 소재지 일대입니다.

칠중성 중성산 정상 아래의 언덕이 천연의 성벽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금도 이 곳에는 많은 참호들이 있습니다.

칠중성 중성산 정상 약간 아래에서 본 정상의 모습입니다. 많은 참호들이 정상을 방어하고 있습니다.

중성산 능선을 따라서 성벽을 쌓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칠중성 중성산의 북쪽편 임진강에서 내려오는 도로에서 본 중성산의 모습입니다.

칠중성 남쪽 적성면 소재지에서 바라본 중성산입니다.

안내표지판

칠중성 위성사진(출처: 야후지도)

칠중성이 있는 중성산은 감악산에서 서북쪽으로 뻗어내린 줄기로서, 북쪽으로 임진강변에 이르기까지 더 높은 산이 없기 때문에 주월리와 가월리를 포함한 임진강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곳은 문산, 파주에서 전곡, 연천으로 이어지는 37번 국도와 개성, 장단에서 의정부, 서울로 들어갈 수 있는 349번 지방도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특히 칠중성의 동북쪽 전방에 있는 가여울 또는 술탄이라 불리는 지점은 삼국시대부터 매우 중요하게 이용되던 교통로이며, 한국전쟁당시에도 중공군이 도하한 지점으로 유명하다. 삼국시대에 이 지역은 처음에는 백제에 속하여 난은별(難隱別)이라 했다가 고구려가 장악하고 난 이후 칠중성이라 하였으며, 신라가 차지한 이후에도 칠중성현이라 부르다가 경덕왕 16년(757) 중성으로 고치고 내소군의 소속현으로 삼았다. 칠중성은 해발 147.7m의 중성산에서 북쪽으로 8부능선을 휘돌아 남쪽으로 능선의 정상부를 따라내려오다가 동쪽부분에는 작은 계곡을 감싸안고 있어 전체적인 형태는 북동-남서향을 장축으로 하는 포곡형의 석축산성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의 전체 둘레는 대략 603m이다. 현재 체성벽이 노출되어 있는 곳을 살펴보면 치석된 할석을 사용하여 줄을 맞추어 정연하게 축조하였으며, 경사가 급한 곳은 성벽의 기저부 바깥쪽으로 보축시설을 하여 성벽을 보강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성벽의 안쪽에는 많은 군용 참호가 파여 있으며, 참호의 벽면에서 많은 양의 와편과 토기편이 출토되고 있다. 와편 중 수키와는 아미성이나 이성산성에서 출토되는 것과 같은 유형의 당초무늬기와가 특징적이며, 암키와편에는 사격자문, 집선문, 승석문 등 다양한 문양이 발견되는데, 고구려와의 특징을 보이는 것도 있다. 토기편은 대략 완이나 합을 비롯해 신라계의 유물이 주로 발견되는데, 이것은 대략 신라 진평왕 25년(603년) 칠중성의 전투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가 한강 하류지역을 확보한 이후 오래지 않은 시점에 칠중성 지역을 확보했을 것이라는 추론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반면 칠중성에서는 백제계의 유물은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일대가 백제의 영역이었을 때에는 이 곳에 방어시설이 없었거나, 있었더라도 소규모의 성이 구축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구려가 장악한 이후 정상부를 중심으로 보루형태의 방어시설이 구축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신라가 이 곳을 장악한 이후 현재 남아 있는 것과 같은 규모의 석축성을 구축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 성은 삼국 중 신라에 의해 가장 중요하게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신라로서는 칠중성이 임진강 수계를 방어하는 데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칠중성은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3만여 명이 인해전술로 밀려 내려올 때 영국군 1개 대대가 3일 동안 버텨낸 전적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출처: 문화원형백과>

칠중성은 해발 147m의 중성산 정상부와 그 남서쪽에 위치한 해발 142m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축조한 테뫼식산성으로 전체 둘레는 603m이고 남북 폭은 198m, 동서 폭은 168m이다. 전체 높이는 북동쪽이 가장 높고 서벽에 비해 동벽 부분이 현저히 낮은 형태를 보이고 있다. 임진강 중류의 남쪽 연안에 위치하고 있어 관서지방과 한강유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 삼국시대에 많은 전투가 있었다. 신라와 고구려의 전쟁이 이 성을 중심으로 시작되었고, 신라의 삼국 통일 전쟁시 나당연합군에 의한 고구려 침공 때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통일 이후에는 신라와 당나라와의 전투에서 그 역할이 매우 컸던 산성이다. 지표조사(2000.10.27∼2001.1.15) 결과 문지 3개소, 건물지 5개소, 우물지 2개소 등이 남아 있음이 확인되었으며, 칠(七)자명의 평기와와 고구려, 백제, 신라시대의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는 등 우리나라 고대사의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역사적·학술적으로 중요한 유적이다. <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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