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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산성_읍성)

단양 온달산성, 온달장군 전사한 장소라는 전설이 남아있는 곳

younghwan 2010. 9. 23.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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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달산성은 단양에서 남한강을 따라서 상류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소백산자락 아래 남한강변 성산에 자리잡고 있는 산성이다. 삼국시대에서 신라 전성기가 시작되는 시점에 고구려와 신라 간에 힘겨루기가 치열하게 있었던 장소로 고구려 온달장군이 전사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곳이다. 산성의 이름은 온달산성으로 고구려 산성으로 여겨지는 곳이지만, 산성이 위치한 장소가 북쪽으로부터의 적을 제압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보아서 신라의 산성으로 여겨진다.

 성을 쌓은 방법을 보면 작은 돌로서 촘촘하게 쌓은 것이 아차산성 등 고구려 산성과 비슷하기도 하며, 신라가 쌓은 보은 삼년산성과 비슷한 방법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고구려, 신라 간에 주인이 여러번 바뀌었을 것 같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이 곳 온달산성에 올라가면 남한강을 중심으로 주위의 풍경이 상당히 아름다우며, 이 곳을 지나가는 사람을 감시하기에 아주 적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강변에 있는 아차산성이나 충주의 장미산성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산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남한강변 해발 400여m 높이의 성산 정상에 자리잡고 있는 온달산성. 작은 돌로 촘촘히 쌓은 것이 고구려 산성의 느낌을 주고 있다.

온달산성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

온달산성 성문.

온달산성 내부.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지는 않겠지만, 내부 성벽은 크게 높지는 않다.
온달산성 내부에는 많은 병사들이 주둔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산성의 규모가 크지는 않다.

온달산성 북쪽 방향 성문에 돈대가 설치되어 있다.

온달산성 성벽위는 폭이 넓지는 않고, 전형적인 한국에 있는 많은 산성 성벽의 모습을 하고 있다. 원래부터 흉벽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흉벽은 없다.

온달산성 성벽은 작은 돌들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촘촘히 쌓았다. 고구려 산성의 성벽과 비슷하다.

온달산성에서 내려다 본 남한강. 건너편 언덕에 온달장군과 관련된 전설이 남아 있다고 한다.

남한강변에서 바라본 온달산성.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에 있는 삼국시대의 성곽.
사적 제264호. 둘레 682m. 석회암과 사암으로 쌓은 석축산성으로서, 성벽이 산의 정상 부근부터 북쪽을 향해 형성된 경사면의 윗부분에 둘려 있는 테뫼식 산성이다. 성벽의 구조는 주로 내외협축(內外夾築)의 형식을 취해 축조되었다. 1989년 충북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했다. 성벽의 기단부는 암반을 이용해 기초를 삼고 있으나 일부 구간에는 암반부를 보강하기 위하여 계단상으로 기단석축을 한 곳도 있다. 이러한 축조방법은 고구려 산성에 많이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 또한 수축된 북쪽 성벽의 기단 보축(補築)은 45° 각도로 역삼각형의 돌쌓기를 하고 거기서 1m 안쪽에 성벽이 축조되는 방법을 사용했다.보은의 삼년산성에서 이러한 방식의 가장 전형적인 예가 나타나고 있다. 성문은 남문·동문·북문의 3군데가 확인되고 있는데, 통행을 위한 보조시설을 갖추고 있다. 성 안에 본래 우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매몰되고 없다. 성 안의 물을 밖으로 빼는 배수시설인 수구(水口)가 북쪽 성벽에 있는데 높이 65㎝의 긴 사다리꼴이다. 성 안에서 채집된 유물로서 토기편·기와편·숫돌·철화살촉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토기편들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로 한정되고 있어 그 사용기간은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였음을 알 수 있다. 온달산성은 광개토왕릉비문에 보이는 아단성(阿旦城)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원래 아단성은 396년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공취한 58성 700촌 가운데 하나인데 실지회복을 위하여 출정한 고구려 온달장군의 전사장소라는 전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출처: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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